프로야구 흥행이 경기장을 넘어 전통시장 풍경까지 바꾸고 있다. 단순히 유니폼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수 사인을 자수로 새기거나 절판된 구제 유니폼을 찾아 시장을 누비는 20~30대 야구팬들이 늘어나면서 방산시장과 동묘시장 등 오래된 골목상권에도 새로운 활력이 돌고 있다. 경기 관람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팀과 선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커스텀 소비' 문화가 확산하면서 전통 제조업과 자영업에도 예상치 못한 특수가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르데스크가 2일 찾은 서울 중구 방산시장은 평일 낮임에도 야구 유니폼을 손에 든 젊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시장 곳곳의 자수 전문점에는 유니폼을 들고 상담을 받거나 완성된 제품을 찾으러 온 야구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는 각 구단 유니폼과 선수 사인이 새겨질 자수 도안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고, 재봉틀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실제 일부 업체는 주문량이 몰리면서 선수 사인 자수는 1~2주, 유니폼 전체 자수 작업은 한 달 가까이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사인 자수 가격은 개당 1만원 안팎이지만 고객들은 원하는 색상과 위치, 문구까지 직접 고르며 세상에 하나뿐인 유니폼을 완성하고 있었다. 한 자수업체 관계자는 "요즘은 야구 시즌만 되면 하루 종일 유니폼 작업만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방산시장에서 만난 허민 씨(33·남)는 유니폼을 품에 안은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야구선수 사인은 시간이 지나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에 사인을 받을 때마다 이곳에 자수를 맡긴다"며 "직접 받은 사인을 오래 간직할 수 있고, 그날의 추억까지 함께 남길 수 있어 계속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재작년부터 야구 인기가 높아지면서 방산시장도 예약은 필수가 됐다"며 "원하는 디자인대로 유니폼을 꾸밀 수 있어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성지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시장 상인들도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자수업체 관계자는 "예전에는 일반 의류 자수 주문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젊은 손님들이 야구 유니폼을 들고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며 "야구 시즌에는 예약을 받아도 작업이 밀릴 정도라 하루 종일 유니폼만 작업하는 날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자수뿐 아니라 유니폼에 개성을 더하는 '와펜(Wappen)' 제작도 인기를 끌고 있었다. 원하는 문구나 로고를 자수 형태로 제작해 유니폼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소비자가 직접 디자인을 요청하거나 준비한 와펜을 부착해 자신만의 응원복을 완성한다.
와펜 제작업체 관계자는 "요즘은 문의 대부분이 야구 관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같은 팀 유니폼이라도 자기만의 개성을 담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하나하나 맞춤 제작을 해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직접 디자인한 와펜을 붙인 뒤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면 다시 찾아오는 단골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온라인엔 없는 유니폼 찾아요"…동묘시장까지 번진 야구 열풍
야구팬들의 발길은 방산시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서울 동묘 구제시장에서는 희귀 유니폼을 찾으려는 젊은 소비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구제 의류 매장 곳곳에는 과거 시즌 유니폼과 절판된 한정판 제품들이 진열돼 있었고, 20~30대 야구팬들은 옷걸이를 하나하나 넘겨보며 원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온라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제품을 직접 확인하고 구매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부러 동묘를 찾는다는 소비자도 적지 않았다.
양동호 씨(26·남)는 "오래된 한정판이나 특정 선수의 기념 유니폼을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동묘를 찾았다"며 "지금 판매하는 유니폼도 좋지만 예전 디자인에는 당시의 추억과 감성이 담겨 있어서 더 소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3년째 유니폼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덕철 씨(가명·71·남)는 최근 시장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김 씨는 "손님의 대부분이 20~30대 젊은 층이고 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며 "야구 인기가 높아지면서 최근 두 달 동안 유니폼만 400벌 가까이 판매했을 정도로 매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이어 "동묘에서 36년 가까이 장사했지만 야구 때문에 이렇게 시장이 활기를 띠는 건 처음 본다"며 "원래 여름은 비수기인데 야구 시즌이 겹치면서 젊은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시장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해 KBO리그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올해 역시 역대 최소 경기 만에 7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이러한 열기는 유니폼과 응원도구 구매를 넘어 선수 사인 자수, 맞춤형 와펜 제작, 구제 유니폼 수집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야구를 즐기는 소비문화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을 찾는 이유도 분명했다. 방산시장에서는 원하는 문구와 디자인을 취향에 맞게 맞춤 제작할 수 있고, 동묘시장에서는 온라인에서 찾기 어려운 희귀 유니폼을 직접 확인하며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기성품 대신 자신만의 취향과 추억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스포츠 소비를 넘어 '개성을 소비하는 문화'가 전통 제조업과 골목상권까지 확산된 사례로 평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지금의 프로야구는 단순한 경기 관람을 넘어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소비 플랫폼으로 진화했다"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유니폼에 자수를 새기거나 희귀 유니폼을 찾는 소비가 늘면서 자수와 봉제 같은 전통 제조업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같은 팀을 응원하더라도 과거 유니폼을 입거나 선수 사인을 자수로 남기며 자신만의 추억과 소장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소비가 늘고 있다"며 "이러한 팬덤 소비는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앞으로 더욱 다양하고 세분화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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