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외화 유동성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장기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까지 커지자 외화 조달을 확대해 환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단순한 자금 조달이 아니라 환율 변동성 확대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적 외화 확보 움직임으로 해석하고 있다.
2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4대 금융지주의 외화대출 잔액은 모두 증가했다. 신한금융의 외화대출 잔액은 지난해 1분기 49조1963억원에서 올해 1분기 54조6682억원으로 5조4719억원 증가하며 가장 큰 증가폭을 기록했다. 하나금융 역시 같은 기간 35조1799억원에서 35조7902억원으로 6103억원 늘었으며 KB금융과 우리금융도 각각 5673억원, 3924억원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기업들의 외화 확보 움직임이 활발해진 배경에는 고환율이 지목된다. 국내 외환시장은 지난 5월 말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이후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1500원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1550원선마저 돌파하면서 원자재 수입과 해외 투자, 글로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들의 외화 조달 부담도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기업들이 활용하는 외화대출은 대부분 미국 달러화로 이뤄진다. 따라서 환율 상승 국면에서는 결제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물론 향후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외화대출 증가가 단순한 운전자금 조달이 아니라 향후 환율 추가 상승 가능성까지 고려한 선제적 대응 성격으로 풀이된다.
기업별로 보면 삼성그룹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졌다. 4대 금융지주 가운데 유일하게 기업별 외화대출 규모를 공시하고 있는 신한금융에 따르면 신한금융의 삼성그룹의 외화대출 잔액은 지난해 1분기 1조3308억원에서 올해 1분기 4조6640억원으로 3조3332억원 증가했다. 불과 1년 만에 외화 차입 규모가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은 올해 1분기 기준 신한금융의 주채무계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외화대출을 보유하게 됐다. 삼성그룹의 신한금융 내 총 익스포저(위험노출액)는 원화대출 5408억원, 외화대출 4조6640억원, 유가증권 6623억원, 지급보증 2조2225억원 등을 포함해 약 8조897억원 규모로 집계됐다.
신한금융이 공급한 유가증권은 삼성그룹이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채권이나 주식 등을 금융회사가 매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급보증은 기업이 다른 금융기관에서 차입하거나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채무불이행 위험을 금융회사가 대신 부담하겠다고 약정하는 신용공여 방식이다.
롯데그룹 역시 외화 조달 규모를 크게 늘렸다. 같은 기간 외화대출 잔액은 4252억원 증가한 1조3536억원을 기록했다. 롯데그룹의 신한금융 내 총 익스포저는 원화대출 2조4879억원, 외화대출 1조3536억원, 유가증권 8439억원, 지급보증 1조5986억원 등을 포함해 총 6조2841억원 규모다.
LS그룹과 한화그룹도 외화 차입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LS그룹의 외화대출은 1조1580억원에서 1조4813억원으로 3233억원 증가했고, 한화그룹도 5436억원에서 7860억원으로 2424억원 늘었다. 한화그룹은 외화대출 증가에 힘입어 신한금융 주채무계열 익스포저 순위에서도 지난해보다 한 계단 오른 4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포스코그룹도 신한금융의 주요 주채무계열에 새롭게 편입됐다. 올해 1분기 외화대출 규모는 8519억원에 달했다.
LS그룹 관계자는 "최근 LS전선과 LS일렉트릭을 중심으로 해외 대형 프로젝트 수주가 잇따르면서 원자재 수입 규모가 크게 늘었다"며 "외화 수요 증가에 따라 외화대출 잔액도 자연스럽게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자재 수입 과정에서 주로 활용하는 유산스(Usance·기한부 신용장) 결제액도 회계상 외화대출로 분류되는데 최근 수주 증가로 결제 규모 자체가 커진 영향도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대기업들의 외화대출 확대를 환율 급등에 대응하기 위한 전형적인 리스크 관리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환율이 지속적으로 오르면 수입 원자재 결제 비용이 증가하고 해외 투자나 설비 도입 비용도 함께 늘어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필요한 외화를 미리 확보해 향후 환율 상승에 따른 부담을 줄이고 자금 조달 창구도 다양화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처럼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와 미국 통화정책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충분한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경영 안정성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으로 평가된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고환율 국면에서 외화를 적극적으로 차입하는 것은 환율 상승에 따른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볼 수 있다"며 "외화대출은 향후 환차손을 최소화하거나 환율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대표적인 환헤지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환율 변동성이 커질수록 기업들은 단순히 필요한 자금만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불확실성까지 감안해 외화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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