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토너먼트 돌입으로 '2026 북중미 월드컵'의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면서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후원사들의 면면에도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 최대 음료기업 중 하나인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 이하 코카콜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코카콜라는 오랜 기간 FIFA 공식 후원사 지위를 유지하며 월드컵 경기장 광고부터 각종 프로모션까지 활발히 참여해 왔다. 코카콜라는 사명에서 드러나듯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료 제품 '콜라'의 최초 개발사다. 많은 사람들이 콜라의 원래 이름을 '코카콜라'로 잘못 알고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갖추고 있다. '코카'는 코카콜라 제품의 브랜드명이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2026년 북중미 월드컵까지…스포츠 광고 강자 코카콜라
미국의 식품·음료 제조기업 코카콜라는 전 세계 200여개 국가에서 콜라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지난해 코카콜라의 매출액은 479억 달러(약 66조원), 영업이익은 137억6000만 달러(약 19조원) 등이었다. 현재 시가총액은 약 3400억 달러(약 470조원) 수준에 달한다. 세계 음료기업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브랜드 인지도는 식·음료 분야를 넘어 다른 분야 기업 제품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인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베스트 글로벌 브랜드 2025' 리포트에 따르면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는 약 601억 달러로 글로벌 브랜드 순위 7위 수준이었다. 앞서 브랜드 평가기관 브랜드파이낸스가 발표한 '2025년 푸드앤드링크 리포트'에서도 코카콜라는 11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비알코올 음료 브랜드로 선정된 바 있다.
국내 시장에서도 코카콜라의 존재감은 상당한 편이다. 코카콜라는 1968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이후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 등 대표 제품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비롯해 프로야구(KBO 리그) 등 주요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워 제품·브랜드 인지도를 꾸준히 높여왔다. 현재 코카콜라의 대표 제품으로는 코카콜라, 코카콜라 제로, 스프라이트, 환타 등의 탄산음료와 미닛메이드, 파워에이드 등의 주스·스포츠 음료가 있다. 지난 2019년에는 코스타 커피를 시작으로 커피·유제품 등으로 제품군을 다변화했다.
글로벌 식·음료 업계 등에 따르면 코카콜라가 오랜 기간 업계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쌓아 올린 압도적인 브랜드 인지도가 자리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지난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스포츠 마케팅을 전개해왔다. 이후 1974년 FIFA와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한 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부터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왔다. 현재까지 약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FIFA와의 후원 관계는 스포츠 마케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파트너십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FIFA가 주최하는 월드컵은 국가와 언어, 문화를 초월해 수십억명이 동시에 시청하는 글로벌 스포츠 행사인 만큼 코카콜라가 추구하는 글로벌 브랜드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많다.
약사 창업주부터 투자재벌까지 수차례 주인 바뀌어…코카콜라 신화 주역은 우드러프 가문
현재 코카콜라는 사모펀드들이 지분을 소유하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이 책임지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최대주주는 '워렌 버핏'이 이끄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로 보유 지분율은 10% 안팎 수준이다. 블랙록, 뱅가드 등도 코카콜라 대주주에 올라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코카콜라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주인들은 코카콜라 신화의 진짜 주역으로 평가되며 지금도 그 이름이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코카콜라 신화의 주역으로는 창업 초기 성장 기반을 마련한 캔들러 가문, 회사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워낸 우드러프 가문 등이 꼽힌다. 이들 두 가문이 코카콜라를 이끈 기간은 무려 100년이 넘는다.
코카콜라의 시작은 1886년 미국 약사 존 펨버턴이 설립한 작은 음료 회사였다. 당시 존은 모르핀을 대체할 새로운 진통제를 찾던 중 코카인 성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 카페인과 코카인을 결합해 콜라를 개발하게 됐다. 최초의 콜라는 음료가 아닌 진통제였던 셈이다. 이후 동료 약사이자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는 존으로부터 콜라의 권리와 브랜드를 인수했고 1892년 코카콜라를 설립했다. 캔들러는 무료 시음 행사와 쿠폰 배포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앞세워 코카콜라의 인지도를 서서히 높여 나갔다. 그 시기 콜라의 원재료에서도 코카인이 사라졌다.
코카콜라의 인지도가 껑충 뛰게 된 결정적 계기는 '병입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직후부터다. 캔들러는 1899년 벤저민 토머스와 조지프 화이트헤드에게 병입권을 부여했다. 코카콜라 원액은 본사가 공급하고 병입업체가 제품 생산과 판매를 맡는 식이다. 덕분에 캔들러는 큰 수고 없이 제품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고 이러한 시스템은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되며 오늘날 코카콜라 글로벌 유통망의 기반이 됐다.
코카콜라 창업과 초기 성장을 이끈 건 캔들러였지만 코카콜라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역은 따로 있다. 1919년 캔들러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코카콜라 지분을 어니스트 우드러프가 이끄는 투자자 그룹에 매각했다. 거래 금액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2500만 달러 수준이었다. 인수 이후 코카콜라는 같은 해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기업으로 거듭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코카콜라 인수를 주도한 어니스트 우드러프는 과거 애틀랜타 금융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금융기관 트러스트 컴퍼니 오브 조지아(Trust Company of Georgia)를 이끌며 기업 인수·합병과 구조조정 분야에서 맹활약했다. 또 애틀랜타 지역 경제계의 한 축을 차지해 온 윈십(Winship) 가문의 일원 에밀리 캐롤라인 윈십과 결혼하며 금융계와 경제계를 아우르는 인물로 거듭났다. 어니스트 우드러프의 누나인 애니 브라이트 우드러프 역시 애틀랜타 지역 내에서 개발업체를 운영하는 조엘 허트와 결혼했다. 지금도 조엘 허트는 전차회사 설립, 도시개발 사업 등을 통해 애틀랜타 지역을 발전시킨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어니스트 우드러프의 장남 로버트 윈십 우드러프(이하 로버트 우드러프)는 코카콜라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889년생인 그는 1923년 코카콜라 사장에 취임한 뒤 회장과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며 1981년까지 무려 60년가량 회사 경영을 주도했다. 로버트 우드러프의 최대 성과는 미국의 음료 기업 수준에 불과했던 코카콜라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 어디에 있는 미군이라도 5센트에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해외 생산시설 확충을 주도했다.
전쟁 과정에서 구축된 해외 공장과 판매망이 종전 이후에도 유지되면서 코카콜라는 단숨에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로버트 우드러프 아내 넬 호지슨 우드러프 역시 미국의 전쟁 영웅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간호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1967년 에모리대학교는 그가 미국 보건·간호 분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간호대학 명칭을 '넬 호지슨 우드러프 간호대학'으로 변경했다. 평생을 코카콜라에 헌신한 로버트 우드러프 부부는 자녀를 낳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 사망 이후 코카콜라는 지금의 전문경영인 중심 체제로 전환됐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코카콜라는 창업가문과 성장가문이 모두 물러난 이후에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대표적인 사례다"며 "혈연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경영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카콜라는 단순히 음료를 판매한 것이 아니라 행복, 긍정 등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브랜드 이미지나 스포츠 이벤트와 결합하는 마케팅 활동 통해 견고한 고객 충성도를 유지해오고 있다"며 "특히 FIFA 월드컵과 지속적인 스폰서십은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코카콜라는 즐거운 축제'라는 공식을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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