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개정 노동조합법이 시행 100일을 넘겼지만 원청의 교섭 책임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이 하청노동자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사용자성을 부정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정부가 법 개정 취지와 ‘모범 사용자’ 원칙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일 취재를 종합하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든든한콜센터지부와 서비스일반노조 모두의콜센터지부는 지난달 30일 정부서울청사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와 국세청을 규탄했다. 두 기관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하청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성이 인정된 정부부처다.
노조는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에도 중기부와 국세청이 하청노동자들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 로펌과 노무법인을 앞세워 사용자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충남지방노동위원회가 지난달 18일과 26일 두 기관의 사용자성을 잇따라 인정했음에도, 교섭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두 기관이 상담사들의 노동조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콜센터지부 측은 “심문과 심사 과정에서 두 기관 모두 상담사들이 사용하는 시설과 장비, 전산시스템과 상담 운영체계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권한은 행사하면서도 사용자 책임은 부정하는 모순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현재 중기부는 국내 대형 로펌 중 한 곳인 법무법인 율촌을 선임해 사용자성을 다투고 있다. 국세청 역시 복수의 노무법인을 선임해 사용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특히 국세청은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신청하면서도 정작 노동조합이 제기한 교섭 의제에 대해서는 원청으로서 응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노동계는 이 같은 대응이 정부의 ‘모범 사용자’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한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월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모범적 사용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적정 임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공공부문이 민간에 앞서 노동조건 개선과 교섭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미 일부 중앙행정기관 콜센터가 공무직 또는 직접고용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도 이 같은 비판에 힘을 싣는다. 고용노동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민권익위원회 등 일부 기관은 콜센터 업무를 상시·지속 업무로 보고 직접고용 또는 공무직 체계로 운영해 왔다. 같은 공공부문 안에서도 어떤 노동자는 직접고용 체계 안에 있고 다른 노동자는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공공운수노조 김현주 든든한콜센터지부장은 “법률 대응에 막대한 행정력과 국민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과연 정부가 보여야 할 모습이냐”며 “정부기관이 앞장서 노조법의 취지를 외면하는 현실을 결코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세청콜센터지회 박기영 사무국장도 “김영훈 장관이 ‘정부가 모범사용자로서 먼저 소통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정작 공공기관 중 제대로 교섭을 시작한 곳은 전무하다”며 고용노동부의 강력한 행정감독과 시정조치를 촉구했다.
하청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성을 부정하려는 공공기관의 움직임은 중기부와 국세청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노조법 시행을 앞두고 일부 공공기관은 하청노조와의 교섭 의무를 ‘리스크’로 규정하고 계약서와 과업지시서 문구를 손봐 사용자성 인정 가능성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에너지환경부·국토교통부·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 17곳의 대응 문건 등을 보면, 이 가운데 9곳이 사용자성 ‘완화’ 계획을 수립했다. 일부 기관은 원청의 ‘작업중지’ 권한을 ‘작업중지 요청’으로 바꾸거나 하청노동자 초과근무 승인 절차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문서상 희석하려 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한국수력원자력,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한국공항공사, 한국도로공사, 여수광양항만공사 등이 관련 사례로 거론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공공기관이 개정 노조법상 원청 교섭 책임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지순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공공부문 역시 원청 사용자성 논란의 당사자인 만큼 정부가 민간과 다른 기준을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면서 “정부가 법 시행의 부담을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 채 제도를 밀어붙인 부작용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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