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임나래 기자] 수도권에 몰린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호남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총 800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팹 4기를 구축하기로 하면서, 생산시설과 협력업체·전문인력을 지방으로 분산하는 ‘국가균형발전’이 시험대에 올랐다. 유력 후보지로 거론되는 광주 첨단3지구 인근 부동산시장에는 벌써 기대감이 번지고 있다.
다만 초대형 투자계획이 곧바로 일자리와 인구 유입,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팹 착공과 가동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반도체 업황과 수요, 전력·용수·전문인력 확보 여부에 따라 투자 속도와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수도권 일극체제를 깰 승부수로 자리 잡으려면 기업 투자를 실제 산업·정주 생태계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제2 반도체 벨트’ 시동…호남에 ‘800조’ 산업단지 조성
정부는 29일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열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분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 중 시장의 시선은 단연 반도체 거점 재편에 쏠렸다. 충청권은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동남권과 대경권은 소재·부품·장비 혁신 거점으로 조성한다. 서남권은 대규모 생산기지로 낙점됐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서남권을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로 조성할 것”이라며 “총 800조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통해 4기의 메모리 팹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전남광주를, 최태원 SK 회장은 서남권을 거론하며 호남권 반도체 벨트 구상에 힘을 실었다.
이재명 정부는 수도권 1극 체제를 깨고 5개 광역권과 3개 특별자치권을 키우는 ‘5극 3특’이 핵심 국정과제다. 대기업의 공장과 인력, 협력업체, 전력 인프라가 함께 움직이는 판이 열리는 셈이다.
◇반도체 따라 집값도 남하…광주에 번지는 ‘제2의 용인’ 기대감
현재 국내 반도체 생산시설은 용인과 평택을 비롯한 경기 남부에 집중돼 있다. 최근 반도체 업황 개선과 업계의 고액 성과급 기대가 맞물리면서 관련 종사자의 구매력이 커졌고, 직주근접 수요까지 더해져 인근 주택시장도 빠르게 달아올랐다.
국토교통부의 ‘2026년 5월 주택통계’에 따르면 미분양 주택은 전남 2798가구, 광주 1259가구로 집계됐다. 하지만 광주 첨단3지구가 반도체 팹 유력 후보지로 거론되면서 인근 부동산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광주 광산구 쌍암동의 공인중개사는 “반도체 생산기지가 거론된 이후 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매수 문의도 이전보다 늘어나면서 시장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대규모 생산설비를 갖춘 기업의 지방 투자는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인센티브를 제공하더라도 정주 여건이 부족하면 기업과 인재를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거·교육·교통 등 생활 기반이 갖춰진 지역을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주 방사광가속기 사업’ 선례…착공·가동까지 ‘장기전’
다만 실제 투자 집행부터 착공, 생산시설 가동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섣부른 기대는 경계해야 한다. ‘청주 방사광가속기 사업’이 대표 사례다. 2020년 충북 청주가 부지로 선정되자 일대 아파트값이 급등했지만, 사업 일정이 거듭 지연됐다. 부지 선정 6년 만인 오는 7월 착공을 앞두고 있지만, 당시 개발 기대감에 크게 올랐던 인근 집값은 대부분 조정됐다.
호남 반도체 프로젝트 역시 장기간에 걸쳐 추진되는 초대형 사업이다. 계획이 실제 생산과 고용으로 이어지려면 반도체 호황이 유지돼야 하고, 기업의 투자도 예정대로 집행돼야 한다. 전력과 용수, 전문인력 등 생산 기반이 제때 갖춰지지 않거나 업황이 꺾이면 투자 속도와 규모가 조정될 수 있다.
박 교수는 “최근 반도체 호황은 생산량 확대보다는 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 증가의 성격이 강했다”며 “향후 수요가 예상보다 둔화하면 대규모 증설이 과잉 공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증설 속도를 결정할 때는 반도체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지, 해당 지역에 생산시설 확대를 뒷받침할 기반이 갖춰져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어 “우수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지, 공장 운영에 필요한 전력과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도 점검하면서 수요와 인프라 확충 속도에 맞춰 유연하고 단계적으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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