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광의 고대 이집트 미술과 신화 #21] 룩소르, 대지에 새긴 문명의 미학⑧ 침묵하는 벽화, 다시 깨어나는 19왕조의 첫 페이지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집트)=한민광 작가] 이집트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어두운 전시실 한구석, 육중하게 서 있는 검은 돌기둥 하나가 관람객의 발길을 완벽하게 붙잡는다.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회색사암은 신왕국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렌프타가 세운 승전비다. 흔히 ‘이스라엘 석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유물이다. 석비의 꼭대기 반원형 공간에는 파라오가 테베의 주신 ‘아문 라’로부터 승리의 칼을 받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 빼곡하게 새겨진 ‘성각문자’들은 왕이 이룩한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찬양한다.
글 말미에 이르러 기묘한 문장 하나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 씨가 마르도다.” 역사학계는 이 문장에 경탄했다. 인류 역사상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이 문자 형태로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승전 문구들이 모두 가감 없는 사실일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고대 파라오들의 관례적인 과장이 섞인 선전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파라오 ‘메렌프타’가 이토록 거대하고 위엄 있는 석비를 왕국의 중심에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거대했던 아버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메렌프타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칭송받는 람세스 2세의 열세 번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너무나 오랫동안 왕좌를 지켰던 탓에, 위의 형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수십 년을 기다린 끝에야 60세가 다 된 노인의 몸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평생을 거대한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숨죽여 살았던 메렌프타에게 이 석비는 단순한 승전 기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거인 같았던 아버지를 뛰어넘어, 자신 역시 이집트를 수호하고 우주의 질서인 ‘마아트’를 유지하는 당당한 파라오임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던 치열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노인의 갈망은 카이로의 박물관을 넘어,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간 고대 테베, 오늘날의 룩소르 서안에 위치한 왕가의 계곡에서 더욱 찬란하고 깊숙하게 발현된다. 파라오가 영원한 잠에 드는 무덤(KV8)은 그가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영적 세계와 예술적 야심의 결정체다.
왕가의 계곡 메렌프타 무덤의 입구는 철저한 보안과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여 있다. 매끄러운 목재 프레임과 촘촘한 마름모꼴 철망 너머로 보이는 무덤의 초입은 우리에게 문명의 깊은 터널을 암시한다. 철망의 한가운데에는 소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 장소의 정체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아랍어와 함께 새겨진 ‘K.V.8 : MERENPTAH’라는 글자는 이곳이 람세스의 아들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메렌프타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성한 명패와 같다.
이 단단한 경계를 지나면 관람객은 문명에서 영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묘한 감각적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안내판이 부착된 밝은 톤의 나무 문틀 위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은 거친 바위산의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소박하고도 철저한 입구는 사막의 도굴꾼들로부터 파라오의 영혼을 지키려 했던 고대의 갈망과, 이를 고스란히 보존하여 미래로 전하려는 현대의 노력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이다.
입구를 통과해 무덤의 첫 번째 회랑으로 들어서면, 양옆을 가득 채운 벽면의 압도적인 웅장함에 숨이 멎게 된다.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길은 길게 설치된 나무 난간이 관람객의 발길을 안전하게 인도한다. 이전 왕조의 무덤들이 좁고 가파르게 하강했던 것과 달리, 메렌프타의 무덤은 탁 트인 폭과 높은 천장을 자랑하며 시원하게 뻗어 있다.
벽면 전체를 빼곡하게 메운 정교한 침강 부조들은 고대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파 내려간 성각문자들의 거대한 숲이다. 은은한 조명이 비출 때마다 벽면에 새겨진 신성한 텍스트들은 입체적인 음영을 만들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천장 부근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붉은색 광물 안료의 흔적들이 얼룩처럼 남아 있어, 이 어두운 통로가 한때는 찬란한 색채로 가득했던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고개를 숙이고 깊은 심연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의 실루엣은 수천 년 전 파라오의 장례 행렬이 지녔던 경건함을 현대적인 풍경 속에 재현해 낸다.
회랑을 따라 더 깊숙이 내려가면, 평면적인 문자의 숲을 지나 한층 더 구체적이고 영적인 형상들이 관람객을 마주한다. 세월의 흐름으로 석고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거친 벽면 위 대단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으로 조각된 자칼 머리의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부조의 중심에는 사후 세계의 인도자이자 미라의 수호신인 아누비스가 신성한 제단 위에 품위 있게 엎드려 있다. 아누비스의 목에 둘러진 붉은 리본의 흔적과 날렵하게 뻗은 귀, 그리고 우아한 꼬리의 선은 고대 이집트 미술이 도달했던 선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아래로는 단정한 가발을 쓰고 고요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는 파라오의 두상이 조각되어 있어, 신과 인간이 사후 세계의 길목에서 조우하는 극적인 정경을 연출한다.
장인들은 딱딱한 석회암 벽면 위에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부드러운 음각 부조를 완성했으며, 떨어져 나간 석고 표면마저도 오랜 역사의 깊이를 더해주는 예술적 질감으로 다가온다.
마침내 공간이 넓어지며 무덤 내부의 주요 전실에 도달하면, 고대 이집트 궁정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려한 채색 부조가 온전한 형태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붉은 황토색으로 칠해진 따뜻한 가공 벽면을 배경으로, 실물 크기에 가까운 두 인물이 대칭적인 구도를 이루며 서 있다.
왼쪽에는 깃털 장식이 달린 정교한 솀셋 왕관을 쓰고 반투명한 흰색 고운 리넨 옷을 입은 파라오 메렌프타가 서 있다. 그는 오른손을 품위 있게 뻗어 신성한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오른쪽에는 태양원반과 우레우스 뱀으로 장식된 매 머리의 신, ‘라-호라크티’가 당당한 체구로 서 있다. 신은 파라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듯 한 손에 앙크 신을 쥐고 왕의 손을 이끈다.
이 부조는 색채의 보존 상태가 가히 기적적이다. 왕의 피부에 칠해진 짙은 붉은색과 신의 가슴에 새겨진 섬세한 칼라 장식의 청색, 녹색 안료는 수천 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생생하다. 인물들의 비례는 완벽하며, 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소통하는 파라오의 모습은 람세스 2세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올랐음을 선포하는 강력한 미술적 선언이다.
신과의 조우를 지나 다음 방으로 이동하면, 이번에는 여러 명의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행렬을 이루는 웅장한 서사적 벽화가 펼쳐진다. 백색으로 마감된 벽면 위로, 수평적인 선을 따라 도열한 신성한 존재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왼쪽부터 미라 형태의 신들과 자칼 머리의 아누비스, 지혜의 신인 이비스 머리의 토트가 차례로 서 있으며, 그 뒤를 이어 강렬한 주황빛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여신들이 손을 맞잡을 듯 서 있다. 인물들의 머리 위로는 각 신들의 이름과 주문을 담은 황금빛 카르투슈와 상형문자들이 리드미컬하게 배열되어 있어, 공간 전체에 시각적인 음악성을 부여한다.
하단 벽면은 세월의 무게로 인해 거칠게 깎여 나가 수천 년 전의 거친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상단에 보존된 신들의 정갈한 실루엣은 사후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완벽하게 대변한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유려한 인물들의 배열 속에서 고대인들이 갈구했던 영적 세계의 평온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무덤의 가장 은밀한 구역으로 들어서면 벽면의 연출 방식은 한층 더 복잡하고 서술적인 구조로 변화한다. 벽면은 이제 거대한 하나의 도서관이나 지도가 되어, 파라오가 가야 할 길을 촘촘한 구획 속에 나누어 보여준다.
이곳은 ‘암두아트’ 혹은 ‘관문들의 서’의 한 장면이다. 상단에는 수많은 영혼과 신들이 정연하게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중앙 단에서는 인물들이 긴 밧줄을 힘차게 쥐고 태양신의 여정을 돕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마침내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했던 태양선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떠 있다. 배의 중앙에 마련된 간이 신당 안에는 밤의 태양신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를 호위하는 신들이 배의 앞뒤로 서 있다.
이 부조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감동을 준다. 지상의 거친 바위 밑 심연에서, 장인들은 파라오의 영혼이 밤의 어둠을 뚫고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거대한 우주의 항해도를 벽면에 고스란히 이식해 놓은 것이다. 횃불의 그을음과 시간의 마모 속에서도 배의 형태와 인물들의 동세는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다.
매장실로 향하는 마지막 전실 벽면에는 지하 세계의 가장 깊은 어둠과 그곳을 지배하는 기묘한 마법적 존재들이 기하학적인 예술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두운 우주를 상징하는 별빛 천장 아래로, 기이한 형태의 뱀들이 벽면을 장식한다.
벽면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여러 번 굽이치며 요동치는 거대한 청록색 뱀의 몸통이다. 그 뱀의 굴곡진 등 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노란색 피부의 신들이 당당하게 서 있다. 상단에는 허리를 숙이고 신성한 물을 바치거나 의식을 수행하는 인물들이 정렬해 있어, 이 기괴한 풍경이 고대 이집트인들의 심오한 장례 신화의 정점임을 보여준다.
머리 위 천장에는 청색 바탕에 십자 모양의 황금빛 별들이 촘촘하게 수놓아져 있어, 이 어두운 지하 방이 곧 우주의 심연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장인들은 뱀의 부드러운 곡선과 별들의 직선적인 규칙성을 대조시키며, 혼돈 속에서도 유지되는 우주의 거대한 질서를 격조 높게 표현해 냈다.
마침내 하강의 끝에서 파라오의 육신이 누워 있던 거대한 매장실에 들어서면, 이 무덤의 최종 주인공이자 예술적 결정체인 석관들이 장엄한 자태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하나의 방 안에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개의 석관 구성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어, 고대 장인 정신의 정수를 한눈에 보게 한다.
이곳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거대한 석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은은한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석관 뚜껑이 누워 있으며, 그 표면에는 오시리스의 형상을 한 파라오의 미라 모습이 아주 완만하고 부드러운 고부조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 공간에는 육중한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외석관의 상단 뚜껑과 하단 몸체가 굳건하게 안치되어 있다. 화강암 석관 위에는 왕의 얼굴과 수호 여신의 날개들이 정밀하게 음각되어 있어, 어떤 침략자도 파라오의 잠을 깨울 수 없을 것 같은 철벽의 위엄을 자랑한다.
평생을 위대한 아버지 람세스의 그늘 밑에서 숨죽이며 늙어갔던 메렌프타는, 이 육중하고 아름다운 돌의 감옥이자 자궁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손을 벗어나 사후 세계의 영원한 군주로 재탄생하는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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