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고예인 기자 | "국가영웅이라 부르고 싶다."
현직 대통령이 국내 기업 총수에게 공개석상에서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향해 "국가 영웅, 국민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총 2100조원 규모의 투자 청사진을 내놓은 두 총수의 결단에 정부가 최고 수준의 예우를 보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라며 "감히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 평가했다. 이어 "기업은 이익을 위해 활동하기도 하지만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활동할 수도 있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했다"고 강조한 뒤 국민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하며 두 총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재계에서는 이번 발언이 단순한 격려를 넘어 AI 시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첨단산업 투자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와 SK그룹이 발표한 투자 규모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를 합쳐 2100조원에 달한다. 기업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산업지도를 새롭게 그릴 초대형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 세계 메모리 1·2위 만든 ‘흔들림 없는 투자’
이 대통령이 두 총수를 '국민 영웅'이라고 표현한 배경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산업적 성과가 자리하고 있다.
두 회사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1·2위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 민감 산업이다. 호황기에는 막대한 이익을 내지만 불황이 시작되면 가격 폭락과 재고 증가가 동시에 찾아온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불황 때마다 투자를 줄이기보다 생산시설과 연구개발을 확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세계 금융위기와 메모리 가격 폭락기에도 공장 증설과 차세대 기술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업황보다 미래를 선택한 이 같은 '혼신의 투자'가 오늘날 세계 메모리 시장 1·2위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두 기업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메모리는 더 이상 단순한 저장장치가 아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의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전략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고대역폭메모리(HBM)는 AI 반도체 시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AI 반도체를 대표하는 엔비디아의 GPU 역시 HBM 없이는 제 성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선도하며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고 삼성전자도 차세대 HBM과 첨단 패키징 기술을 앞세워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엔비디아를 비롯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인프라 확대 경쟁을 벌이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략적 가치도 더욱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제 두 기업을 단순한 메모리 제조사가 아니라 글로벌 AI 생태계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평가한다.
▲ "아무도 가지 않은 길"…AI 시대도 선제 투자
두 총수의 공통점은 시장이 확인된 뒤 움직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먼저 보고 투자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기흥·화성·평택·용인으로 이어지는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기지를 구축했고 이번에는 광주를 새로운 첨단 반도체 생산거점 후보지로 제시했다. SK그룹 역시 AI 데이터센터에 1000조원, 반도체 공급 확대에 1100조원을 투자하는 청사진을 내놓으며 또 한 번 초대형 승부수를 던졌다.
SK하이닉스는 당초 2045년 완공 예정이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12년 앞당기기로 했고, 청주 낸드 증설과 서남권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도 추진한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투자 확대가 아닌 AI 시대를 대비한 '선제 투자'로 해석한다. AI 서비스와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로봇, 피지컬 AI 확산으로 고성능 메모리 수요는 앞으로도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먼저 투자하는 기업이 시장을 선점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삼성과 SK가 세계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과정 역시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던 미래 시장에 먼저 뛰어든 결과였다. 이번 투자 역시 같은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호남 투자는 정치 아닌 '국가 백년대계'
이번 발표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대목 가운데 하나는 호남권 투자다. 일각에서는 이를 지역 정치와 연결해 해석하지만 산업계에서는 오히려 국가 산업 전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산업이다. 앞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재생에너지 확보 능력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빅테크와 반도체 기업들이 RE100 대응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확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호남권은 태양광과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큰 지역으로 꼽힌다. 수도권에 집중된 산업 인프라를 분산하고, 전력망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국가균형발전까지 함께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대규모 산업부지 확보 역시 수도권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대통령도 이날 "원스톱 행정절차는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겠다"고 밝히며 전력과 용수, 전기요금, 정주여건까지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기업의 투자와 정부의 인프라 지원이 맞물릴 경우 서남권이 새로운 첨단산업 거점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 기업은 투자, 정부는 뒷받침…민관 원팀 시험대
이번 국민보고회는 단순한 투자 발표 자리가 아니었다. 기업은 미래를 향해 2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선언했고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구축으로 이를 뒷받침하겠다고 화답했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전력망 확충과 용수 확보, 신속한 인허가, 전문인력 양성, 정주환경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산업이 아니라 수십 년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발표가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누구도 쉽게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하며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선도해 왔다. 그리고 다시 AI 시대의 갈림길에서 대규모 선제 투자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재명 대통령이 두 총수를 향해 '국민 영웅'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시대 국가 경쟁력은 정부만으로도 기업만으로도 만들 수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과감한 민간 투자,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의 정책과 인프라가 맞물릴 때 비로소 새로운 산업 지도가 완성된다.
삼성과 SK가 내놓은 2100조원 투자 계획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AI를 소비하는 나라를 넘어 AI와 반도체를 통해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가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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