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일본 세토내해에 떠 있는 작은 섬 나오시마와 데시마를 둘러보며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유명한 건축물이나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섬을 대하는 일본 사회의 태도, 더 정확히는 지역을 '디자인'하는 방식이었다.
◇ 일본, 새로 짓는 대신 '있던 것'을 깨웠다
나오시마는 인구 3천여 명, 면적 약 8㎢의 작은 섬이다. 한때 미쓰비시 구리 제련소가 들어서며 경제적 활기를 얻었지만 환경은 황폐해졌고, 산업구조가 바뀌자 공장이 멈추고 사람들이 떠났다. 이 버려진 섬을 되살린 것은 출판·교육기업 베네세(옛 후쿠타케)와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다. '잘 산다'를 뜻하는 라틴어(bene·esse)에서 이름을 딴 베네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섬에 미술관과 숙박시설을 들였고, 안도 다다오는 언덕을 파 땅속에 지추(地中)미술관을 앉혔다.
이웃한 데시마는 면적 14.5㎢, 인구 700명 안팎의 더 작은 섬이다. 1990년대 산업폐기물 불법 투기로 몸살을 앓았던 이 섬은 화려한 시설을 더하는 대신 버려졌던 계단식 논과 바다, 느린 이동을 그대로 살려 예술과 음식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2010년 시작된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는 3년마다 열리며 무대를 17개 섬과 연안으로 넓혔고, 회를 거듭하며 누적 370만 명가량을 불러 모았다. 고령화와 산업 쇠퇴로 가라앉던 섬들이 예술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관통하는 원리는 분명하다. 일본은 관광객을 위해 새 자원을 발명하기보다, 그 지역에 이미 있던 음식·풍경·생활을 발견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오래 기억할 경험으로 옮겼다. 디자인의 언어로 옮기면 '지역 정체성 디자인'(Local Identity Design)에 가깝다. 관광객은 나오시마에서 미술관과 함께 예술과 자연이 섞인 섬의 공기를 경험한다.
◇ 한국에도 이미 '이야기'가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지역 관광을 떠올리게 된다. K-팝과 K-드라마, K-푸드를 앞세운 한류의 힘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은 꾸준히 늘고, 발길도 서울을 넘어 부산·제주·강릉·전주로 퍼지고 있다. 관광객을 불러오는 일은 어느 정도 풀린 셈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들이 한국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다. 다행히 한국에는 이야기로 엮을 자산이 곳곳에 있다.
강릉은 커피로 도시의 인상을 새로 썼다. 안목해변의 자판기 커피에서 출발한 문화가 바리스타와 로스터리로 자라났고, 해마다 커피 축제를 열며 '커피 도시'라는 정체성을 굳혔다. 동해의 탁 트인 풍경과 커피 한 잔이 한데 묶이자, 많은 사람은 커피를 마시러 강릉을 찾고 강릉을 커피로 기억한다.
전주는 음식이라는 일상을 세계가 인정하는 자산으로 키웠다. 2012년 전주는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에 이름을 올렸다. 콜롬비아 포파얀, 중국 청두, 스웨덴 오스터순드에 이은 세계 네 번째였다. 비빔밥과 한정식, 콩나물국밥 같은 가정식이 한옥마을의 풍경과 만나면서 전주는 '맛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통영은 예술가의 고향이라는 내력을 도시 전체의 결로 풀어냈다. 작곡가 윤이상과 소설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을 낳은 이 항구도시는 2002년부터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를 열어왔고, 2014년에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통영국제음악당을 세웠다. 가파른 언덕의 낡은 동네는 동피랑 벽화마을로 되살아났다. 한려수도의 바다와 음악, 그림과 골목이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통영은 '예술의 도시'로 읽힌다.
군산은 아픈 근대의 흔적마저 자산으로 바꿨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항이었던 군산에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세관, 경암동 철길마을 같은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다. 군산은 이를 허무는 대신 '시간여행축제'로 엮어, 도시의 한 구역을 1930년대로 되돌리는 경험을 설계했다.
제주는 섬의 삶 자체를 세계유산으로 끌어올렸다. 산소 장비 없이 10m 바다로 들어가 숨비소리를 내며 물질하는 해녀 문화는 2016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고, 2023년에는 제주 해녀 어업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도 인정받았다. 화산이 빚은 오름과 검은 돌담, 해녀의 일상이 어우러진 풍경은 다른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제주만의 세계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담양 죽녹원, 보성 녹차밭, 순천만 갈대밭도 같은 결의 사례다.
문제는 자산의 유무가 아니다. 흩어진 자산을 얼마나 일관된 경험으로 이어주느냐다. 한국의 많은 지자체가 축제를 열고 전망대를 세우고 포토존을 만들지만,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곤 한다. 관광객을 불러오는 방법은 고민하면서도, 그들이 왜 다시 찾아와야 하는지에 대한 답까지는 설계하지 못한 탓이다.
◇ 관광의 미래는 '세계관'에 있다
다시 필자가 다녀온 세토내해를 떠올렸다. 오래 남은 것은 세계적인 건축이나 유명 작품보다, 다카마쓰에서 먹은 우동 한 그릇, 섬과 섬을 잇던 배 위의 바람, 데시마 미술관 천장 너머로 들리던 새소리, 작은 식당에서 마주친 주민들의 평범한 하루였다. 관광지를 본 기억이라기보다 하나의 세계를 통과한 기억에 가까웠다.
여행의 무게중심도 옮겨가고 있다. 명소 앞에서 인증사진을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지역에서만 흐르는 시간과 분위기를 경험하려는 사람이 늘었다. 나오시마가 세계적 관광지가 된 힘은 미술관 한 곳에 있지 않다. 예술과 건축, 자연과 음식, 주민의 삶과 배를 타고 드는 과정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 데 있다.
디자인의 역할 역시 달라졌다. 새 건물을 세우고 화려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서 나아가, 지역의 역사와 자연, 사람의 삶을 하나의 경험으로 엮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로 옮겨가고 있다. 앞으로의 관광 경쟁력은 시설의 규모보다 그 지역이 품은 세계관의 힘에서 갈린다. '노란 호박'이 나오시마를 기억하게 하듯, 강릉의 커피와 제주의 숨비소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인구가 줄고 지역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정작 디자인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다시 찾고 싶어지는 지역의 이야기다. 떠났던 섬에 사람이 다시 모인 까닭도 결국 거기에 있었다.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기업 ㈜카우치포테이토 대표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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