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동유럽 자료 연구 산증인…전시·출판 다양한 학술 성과
"홈리스에게도 열린 도서관…시민과 '보물' 공유가 기부 이끌어"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던 뉴욕공립도서관(NYPL) 슬라브·발트 부서는 2008년 전격 폐지됐다. 미국 슬라브학계의 반발도 조직개편을 막지 못했다. 동료 사서들이 은퇴하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한국인 유희권 씨는 자리를 지켰다.
30일 연합뉴스와 전화로 만난 유씨는 "당시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등에서 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이제 누가 우리 연구를 도와주느냐, 미스터 유라도 남겨달라'고 요청했다고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터 유'는 맨해튼 42번가 뉴욕공립도서관에서 러시아·동유럽 자료를 찾는 전 세계 연구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유씨의 일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열람실 가운데 하나인 로즈 메인 리딩룸이다. 레온 트로츠키, 노먼 메일러 등 당대 지성들이 연구와 집필, 사색을 위해 찾았던 열람실은 지금도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과 연구자로 가득 찬다. 유씨는 단순한 사서가 아니라 자료 연구와 컬렉션 구축, 연구 지원을 맡는 라이브러리안이다. 하루 2∼3시간은 온오프라인으로 도착한 자료 문의에 답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료를 연구한다.
올해로 26년째 사서 업무와 병행한 연구는 여러 학술 성과를 낳았다.
그는 뉴욕공립도서관의 러시아·동유럽 시각 자료를 집대성한 목록집을 출간해 2009년 미국예술도서관학회(ARLIS)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가 20세기 초 한국에서 남긴 사진첩을 발굴·연구해 '사진으로 보는 초창기 한국 정교회의 선교(1906-1930)'를 펴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비어 있던 부분을 살려낸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씨가 처음부터 사서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1993년 러시아학을 공부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유학을 왔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유학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진로를 바꿨다. 일자리를 얻기 용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학을 다시 공부했고, 2000년 뉴욕공립도서관에서 인턴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공도서관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런 세상이 있나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유씨는 방대한 소장 자료, 특히 미국 최고 수준의 예술 컬렉션에 매료됐다. 상사였던 슬라브·발트 부서의 에드워드 캐스넥 박사는 그에게 자료 전산화뿐 아니라 전시, 학술 교류, 출판 등 다양한 업무를 맡겼다. 유씨는 "귀인을 만났다"며 "그 덕분에 전문 사서로서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현재 유씨는 뉴욕공립도서관 연구도서관의 유일한 한국인 사서다. 4개 연구도서관과 88개 분관으로 구성된 뉴욕공립도서관에서 그가 근무하는 맨해튼 42번가 본관은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랜드마크다.
유씨는 뉴욕공립도서관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로 '철저한 개방성'을 꼽았다.
"대학도서관이나 의회도서관처럼 출입이 제한된 곳과 달리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관광객뿐 아니라 홈리스도 이용합니다. 제가 수많은 유럽 도시를 돌아봤지만, 이런 도서관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어 뉴욕공립도서관이 세계적인 연구도서관으로 자리 잡은 배경으로 소장 자료를 시민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문화를 들었다.
"우리는 상설 전시를 자주 엽니다. 보물을 컬렉션으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게 되고, 가치가 있는 곳에 투자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기부도 이어집니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료를 기증하려는 사람들도 더 늘어나고요."
실제 뉴욕공립도서관에는 구텐베르크 성경 인쇄본, 미국 독립과 관련한 토머스 제퍼슨의 자필 문서, 러시아 황실 자료 등 '보물'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유씨는 "역대 한국 영부인 3명의 뉴욕 방문 때 도서관 방문이 추진됐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며 "책과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직접 둘러봤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도 귀중한 자료가 정말 많다"며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좋은 자료가 많을 텐데 더 많이 보여주면 좋겠다. 사람들은 보물을 보고 싶어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공지능(AI)이 세상을 집어삼키는 시대에도 사서의 본질은 대체될 수 없다고 자신했다.
"일반 정보는 AI가 더 잘 찾을 수 있겠지만 연구자는 원본 자료와 아카이브를 보러 옵니다. 그런 자료는 아직 전산화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 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 같은 대인 서비스는 AI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도서관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이니까요."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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