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클러스터를 호남 등 지방으로 분산 이전해야 한다는 ‘국가 균형 발전’ 목소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글로벌 기술 전쟁이 초단위로 벌어지는 반도체 산업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정치적 안배만을 앞세우다간 국가 핵심 성장 동력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호남 이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파괴되는 ‘집적 효과’… “생태계 통째로 옮기기 불가능”
반도체는 대기업 공장 하나만으로 가동될 수 없는 대표적인 ‘생태계 산업’이다. 현재 경기도 용인과 평택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설계 전문(팹리스) 기업, 후공정(OSAT) 업체들이 촘촘한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협력사 엔지니어가 몇 분 내로 현장에 도착해 대응해야 한다”며, “대기업 생산 라인만 호남으로 내려갈 경우, 물류비용 폭증은 물론 기술 협력의 시차가 발생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R&D(연구개발)와 생산 기지가 물리적으로 분리될 경우, 반도체 수율(합격품 비율) 확보에도 치명적이라는 분석이다.
② “사람이 안 내려간다”… 고질적인 전문 인력 확보 난제
가장 가시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는 ‘인재 확보’다. 고도의 숙련된 엔지니어와 석·박사급 연구 인력의 수도권 선호 현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대학의 한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현재도 지방 소재 반도체 관련 학과 졸업생들조차 수도권 취업을 고집하는 상황”이라며, “핵심 인력들이 지방 이주를 기피해 이탈하기 시작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고 꼬집었다. 수도권에 밀집한 주요 대학 및 국책 연구기관과의 산학 협력 생태계가 단절되는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③ 전력·용수 등 인프라 조기 구축 불확실성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중단 없이 막대한 양의 ‘초고품질 전력’과 ‘공업용수’가 공급되어야 하는 인프라 집약적 시설이다.
호남 지역이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자원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를 반도체 공장이 요구하는 안정적인 초고압 전력으로 변환해 적시에 공급할 수 있는 송배전망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신규 인프라 구축에만 수년에서 수십 년이 소요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뭄 등 수자원 확보 리스크와 천문학적인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과 세금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치적 접근 지양해야… 차별화된 우회 전략 필요”
국내 자본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파운드리 공장 입지를 정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효율성’과 ‘속도’다. 미국, 대만, 일본 등 경쟁국들이 파격적인 보조금을 앞세워 자국 중심의 초고속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만 내부적인 입지 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제 전문가들은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은 좋지만, 국가 전략 산업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며, “만약 호남 지역의 발전을 도모한다면 입지 제약이 덜하고 호남의 재생에너지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친환경 데이터센터, 또는 전후방 연관 산업(패키징 및 테스트 등)을 특화 유치하는 식의 현실적인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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