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특정 정당의 깃발도, 무대 위에서 군중을 지휘하는 뚜렷한 지도부도 없다. 그런데도 주말마다 수만 명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위키트리는 이 광장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보고 여섯 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 어느 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이유로 모였는지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나온 시민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처음엔 익숙한 주말 풍경이 펼쳐진다. 잔디밭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아이들은 뛰어다닌다. 가족들은 도시락을 먹고, 연인들은 산책을 즐긴다. 여느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은 달라진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북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어느 순간 수백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진다.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 개표 수개표!" 피크닉과 시위가, 아이스크림과 구호가, 웃음과 분노가 불과 100m 남짓한 거리를 두고 공존한다. 이들은 왜 주말을 반납했을까. 왜 비가 오는 날에도 이 자리를 지킬까. 그 이유를 듣기 위해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참가자들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조심스러웠고, 동시에 예상보다 단호했다.
"국민이 선거결과 신뢰해야 민주주의 작동"
20대 참가자 류모씨는 인터뷰 내내 '부정선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신뢰' '시스템' '납득'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었다. 류씨는 "재선거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혁이 먼저"라며 "국민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는데 지금은 선관위에 대한 신뢰 자체가 크게 훼손된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을 다시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에게 확실한 신뢰를 보여줄 수 있다면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선관위 해명이 충분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했다. "여전히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류씨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행정 실수로 보지 않았다. "선관위는 이미 채용 비리 논란, 가족 특혜 채용 문제, 감사원 감사 거부 논란을 겪으며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또 관리 부실이 발생하면서 선거 관리 전반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중요한 건 의혹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국민이 선거 시스템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잠실 올림픽 공원에 나온 시민들. / 위키트리
광장에서 만난 또 다른 참가자도 결을 같이했다. 그는 "재선거만 다시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선관위 자체를 손보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표현의 강도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이번 사태를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선관위 신뢰의 문제로 보고 있었다.
"좌와 우로 사람 나누는 문화 너무 소모적"
참가자 이모씨가 광장에 나온 계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지상파 뉴스를 식사 때마다 챙겨볼 만큼 언론을 신뢰하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씨는 "재선거와 선거 투명성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을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직접 보면서 중립성과 공정성에 실망하게 됐다"며 "예전에는 보도를 거의 그대로 믿었지만 지금은 어떤 기사를 보더라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모든 보도를 부정하진 않았다. 핸드볼 유소년 국가대표 선수들의 소지품 수색 논란을 두고는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조치를 한 것은 선을 넘은 일"이라고 했다. 반면 펜싱 국가대표 장비 논란에는 판단을 유보했다. "장비를 두고 왔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수 본인은 조용한데 주변에서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사실부터 확인됐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봉쇄가 길어지면서 펜싱 국가대표 오상욱 등 일부 선수는 핸드볼경기장 내 사무실의 개인 장비를 챙기지 못해 아시아선수권대회 출국을 앞두고 다른 선수의 장비를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자신이 나온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념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참정권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시민들을 위해 모기탈취제, 에프킬라 등이 놓여있다. / 위키트리
정치 성향을 묻자 답변은 다양했다. 한 참가자는 자신을 보수나 진보 어느 쪽으로도 규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각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와 우로 사람을 철저히 나누는 문화가 너무 소모적입니다.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는 인정하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한때 스스로를 보수로 여겼다는 그는 비상계엄에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계엄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굉장히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장 일각의 계엄 옹호 주장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자기 성향을 분명히 밝힌 참가자도 있었다. "저는 보수 성향이라고 생각하고, 부끄럽게 느낀 적은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중도나 정치적 무관심이 가장 상식적인 태도처럼 여겨지는데, 지금의 여러 문제도 그런 방관 속에서 커졌다고 봅니다." 다만 그 역시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와는 선을 그었다. "정당보다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와 절차,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입니다." 성향은 서로 달랐지만, 진영보다 신뢰를 먼저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닮아 있었다.
잠실 시위를 '극우 부정선거론자들의 시위'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참가자들은 저마다 답했다. 한 참가자는 "현장에 와보면 아이 손을 잡은 부모도, 연인도, 학생도 있다. 참여층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데도 시위 전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규정하려는 시선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일부 극단적인 주장이나 행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참가자를 똑같이 보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라고 했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붙여진 벽보들. / 위키트리
확신의 차이는 30대 기혼 여성 참가자에게서 잘 드러났다. 그는 선관위의 설명을 "해명이 아니라 합리화"라고 표현했다. "국가기관이 '단순 실수였다'고 말하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는데, 선관위는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수뇌부 사퇴 역시 책임이 아니라 논란을 피하기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자신을 진영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됐든 문제가 있으면 문제죠. 다만 참정권 문제에는 반드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침묵이 답답하다고 했다. "계엄 때는 사회 전체가 들끓었는데, 선거 논란에는 법조계도 정치권도 너무 조용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면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선관위가 독립기관이라 정부 개입이 어렵다는 주장에는 "독립기관이라 해도 이 정도 논란이면 사회 전체가 점검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복잡하다고 했다. "부정선거라고 생각합니다. 재선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복잡합니다.“
잠실 올림픽공원 현장에 나온 사이버 트럭. / 위키트리
"어떤 결과도 납득할 수 있는 시스템 필요"
광장 한편에서 만난 또 다른 참가자는 좀 더 구체적인 요구를 내놨다. "투표지를 공개된 자리에서 국민이 볼 수 있게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일 같지 않은데 계속 안 된다고만 하니 답답합니다." 그는 "대만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개표를 한다고 들었다.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만 전면 수개표 도입은 시간과 비용, 정확성을 놓고 의견이 갈리는 사안이다. 정부와 선관위는 일부 의혹에 대해 음모론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참가자 상당수는 결과 자체보다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이 시위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한 참가자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역사는 결국 승리한 쪽의 시각이 더 강하게 반영되곤 합니다. 이 일이 어떻게 기록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평범하게 살아가던 시민들이 정치적 권리와 민주주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라는 점은 남을 것 같습니다." 참가자 서모씨는 더 단호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의 신뢰입니다.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패배한 쪽도 결과를 인정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됩니다." 그는 이번 시위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선거 관리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한 움직임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재선거를 주장하는 사람, 선관위 개혁을 우선 과제로 꼽는 사람, 언론을 비판하는 사람, 정치권 전체를 불신하는 사람이 뒤섞였다. 다만 인터뷰 내내 반복해서 들린 단어가 하나 있었다. '신뢰'였다. 류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같은 말을 다시 꺼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납득할 수 있는 시스템. 그거 하나면 됩니다."
김지현·정혁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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