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박정현 기자 | 정부가 호남권을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성패는 생산시설보다 인재와 산업 생태계를 얼마나 빠르게 구축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기존 반도체 거점인 용인·평택 산업단지의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진단하며 호남을 새로운 첨단산업 거점으로 육성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세부적으로 광주·전남 통합특별시를 중심으로 총 800조원을 투입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팹을 각각 2기씩, 총 4기 구축하기로 했다.
호남은 지리산(호남정맥) 남쪽 지역으로, 광주과학기술원(GIST), 조선대,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전북대, 전남대 등 반도체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 밀집해 있다. 국가AI데이터센터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등 연구기관도 자리 잡고 있다.
수도권처럼 대규모 생산공장이 있는 구조는 아니지만 AI 및 반도체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들이 집적돼 있고 목포항, 평택항, 군산공항, 광주공항을 통해 물류 이동이 유리하다는 점이 호남권의 강점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정부의 지방 균형성장 기조에 맞춰 최대 5개 반도체 공장을 호남과 충청권에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실제 클러스터 조성 여부는 인재와 산업 생태계 구축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은 대규모 투자로 구축할 수 있지만 연구인력과 엔지니어, 협력기업, 물류망은 단기간에 조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앵커기업이 먼저 입지하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과 연구개발 기능, 전문인력이 함께 모이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정주 여건과 협력사 생태계가 충분하지 않으면 기존 수도권 클러스터의 경쟁력을 옮기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인재 있지만 일자리 없었다"...17개 반도체 학과의 현실
호남권에는 17개의 반도체 관련 학과가 운영되고 있지만 지역에서 양성한 인재는 대부분 수도권으로 향하고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갖춰졌지만 졸업생들이 취업하거나 창업할 수 있는 반도체 기업과 산업 생태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득조 광주과학기술원 반도체학과 교수는 "GIST 졸업생들은 대부분 수도권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수도권에서 창업한다"며 "광주에서 창업하더라도 고객사와 협력업체, 투자 생태계가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호남에 반도체 인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 수도권으로 가는 것"이라며 "반도체 산업은 박사급 연구원뿐 아니라 학·석사 엔지니어와 전문대·고졸 기술인력까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산업"이라고 설명했다.
인력난은 지방 반도체 거점 전반의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지역 제조업 일자리 지원 사례와 모델'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청주사업장과 DB하이텍 음성공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충북 역시 낮은 임금과 정주 여건 등의 영향으로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 "취업 남방한계선은 평택, 연구개발 남방한계선은 판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우수 인재와 연구개발 기능이 수도권에 집중된 현실을 보여준다.
▲ 성공 열쇠는 소부장 생태계
더 큰 과제는 산업 생태계 구축이다. 반도체 공장은 단순히 생산시설만 들어선다고 경쟁력이 생기지 않는다. 수백 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을 비롯해 장비 유지·보수 업체, 물류기업 등이 함께 집적돼야 안정적인 공급망과 비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앵커기업이 입주하더라도 소부장 기업들이 단기간에 함께 이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협력망과 숙련 인력, 기존 거래처를 동시에 이전해야 하는 부담이 커 기존 거점을 쉽게 떠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실에 제출한 '지역별 반도체 관련 기업 분포 현황'에 따르면 서남권(광주·전남·전북)의 반도체 기업 비중은 2.6%에 그쳤다. 수도권이 69.4%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충청권 18%, 대경권(대구·경북) 6.1%, 동남권 3.4% 순이었다. 생산시설을 유치하더라도 기존 수도권 중심의 소부장 생태계를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다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 역량을 기반으로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한 대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는 호남 역시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연구개발(R&D) 기관과 생산시설, 소부장 기업이 단계적으로 집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독자적인 반도체 클러스터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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