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유병자와 고령층을 겨냥한 간편보험 시장의 경쟁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고지 항목을 줄여 가입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같은 유병자라도 위험도를 얼마나 정교하게 구분하느냐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2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주요 보험사들은 보유 계약과 보험금 지급 데이터는 물론 외부 의료 빅데이터까지 활용해 언더라이팅(인수심사)을 고도화하고 있다. 간편보험 시장이 단순한 가입자 확보 경쟁에서 위험을 세밀하게 분류하는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간편보험은 병력 고지 항목을 간소화해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자의 보험 가입 기회를 넓힌 상품이다. 보험 사각지대를 줄였다는 평가를 받지만 가입 대상이 확대될수록 보험사 입장에서는 손해율 관리 부담도 커진다. 같은 질환 이력이 있더라도 치료 경과와 처방 내용, 의료 이용 패턴에 따라 실제 위험 수준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험사들은 유병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보기보다 데이터를 활용해 위험도를 세분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가입자를 많이 확보하는 것보다 위험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분해 보험료와 인수 기준에 반영하느냐가 수익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그리는 ‘가상 가입자’
생명보험업계에서는 가상 언더라이팅 활용이 대표적이다. 삼성생명은 2023년 글로벌 재보험사 스코르(SCOR)의 빅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상 언더라이팅을 운영하고 있다. 자체 보유계약 정보와 10년치 실손보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혈압, 갑상선질환 등 기왕력별 인수 가능성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교보생명 역시 스코르와 협업해 가상 언더라이팅 모델을 도입했다. 실손보험 보험금 지급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상 손해율을 산출하고 질환별 인수 기준의 적정성을 검증하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은 지난해 데이터 기반 심사 시스템인 ‘Quick-UW’를 도입했다. 당·타사 보험금 청구 이력과 기존 고지 정보를 종합해 가입 단계에서 승낙·심사·거절·연기 가능성을 사전에 판단한다.
손해보험사들은 AI 심사와 고지 체계 세분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현대해상은 AI 기반 자동심사 시스템 ‘2Q-PASS’를 활용해 우량 가입자를 선별하고 일부 상품에서는 심사자 개입 없이 계약 체결이 가능하도록 했다. 최근에는 간편보험 가입 대상 일부를 일반 상품으로 편입하는 데도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KB손해보험은 유병자 전용 상품에서 고지 항목과 기간을 세분화했다. 같은 질병 이력이 있더라도 경과 기간과 질환 종류에 따라 위험도를 다르게 평가하는 구조다.
결국 생보사는 데이터 기반 위험 예측에, 손보사는 AI 심사와 고지 체계 세분화에 각각 강점을 두며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넓히는 경쟁에서 나누는 경쟁으로
이 같은 변화는 간편보험 시장 확대와도 맞물려 있다. 유병자보험은 성장성이 높지만 위험률 산정이 쉽지 않은 상품군이다. 위험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평가하면 보험료가 비싸져 경쟁력이 떨어지고, 반대로 심사 기준을 완화하면 손해율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위험의 정교한 분류다. 같은 고혈압 이력이 있더라도 약물 복용 여부와 합병증 유무, 최근 진료 기록에 따라 위험 수준은 달라진다. 당뇨나 고지혈증 역시 관리 상태에 따라 보험사가 부담하는 위험의 크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해외 의료 빅데이터까지 활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흥국화재는 최근 ‘일본 No.1 헬스케어 데이터가 여는 보험상품 개발의 미래’ 세미나에서 일본 JMDC 의료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 사례를 공개했다. JMDC는 일본 건강보험조합 가입자의 진료·처방·건강검진 정보를 보유한 대표 의료 빅데이터 기업이다.
흥국화재는 국내 보험사 가운데 처음으로 해당 데이터를 도입해 질병 이력과 의료 이용 패턴에 따른 위험도를 분석하고 이를 간편보험 할증 체계와 비교·검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향후 상품 개발과 위험률 산정 고도화에 활용할 계획이다.
다만 데이터 활용이 확대된다고 해서 모두에게 보험료 인하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위험 분류가 정교해질수록 우량 가입자는 더 낮은 보험료를 적용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위험도가 높은 집단은 할증이나 인수 제한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간편보험 시장이 커질수록 가입 문턱을 낮추는 것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가입자를 받느냐보다 같은 유병자 안에서도 위험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분하느냐가 상품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