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약초에서 채소로, 당근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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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약초에서 채소로, 당근의 내력

연합뉴스 2026-06-29 14:00: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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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제주 흙당근 제주 흙당근

[촬영 조채희]

인류는 오래전부터 땅속에서 자라는 식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늘의 기운은 잎으로 모이고 땅의 기운은 뿌리로 응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주황빛 태양의 색을 품은 당근을, 양생 전문가들은 생명의 정기를 저장한 뿌리로 여겼다.

당근은 약이 먼저였고 채소는 나중이었다. 원산지는 오늘날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대로, 약 5천 년 전부터 식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야생 당근은 지금처럼 굵고 단 주황색 뿌리가 아니라 보라색이나 노란색, 흰색을 띤 가늘고 질긴 뿌리였고, 사람들은 뿌리보다 씨와 잎을 약재나 향신료로 썼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황색 당근은 한참 뒤의 산물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노란색과 붉은색 계통을 교배해 심까지 고르게 물든 단맛 강한 품종을 길러냈는데, 독립 영웅 오라녜 공(오렌지공)을 기리는 상징색이 주황이었던 까닭에 이 색을 집중 보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맛과 색을 앞세운 이 품종이 이내 세계의 표준이 됐다.

동쪽으로는 13세기 원나라를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다. '농상집요'에 약용식물로 올라 있고, '본초강목'은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식욕을 돋우며 이로움만 있고 해가 없다 하여 그 효능이 인삼에 견줄 만하다고 적었다. '작은 인삼'이라는 뜻의 '소인삼'(小人蔘)이라는 별칭이 여기서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물보'와 '임원경제지'에 기록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말의 사료로 여겨지다 점차 식탁으로 올라왔다.

◇ 당근의 양생학

양생은 음양의 균형을 중히 여긴다. 당근은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아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일용본초'는 속을 편안하게 하고 기를 아래로 내려 위장의 정체를 풀어준다고 했고, '의림찬요'는 신장을 윤택하게 하고 원양을 북돋우며 하초를 따뜻하게 한다고 기록했다.

당근의 가장 큰 미덕은 비위(脾胃)를 튼튼하게 하는 데 있다. 약선에서 비위는 음식을 기혈로 바꾸는 공장이자, 군대로 치면 병참기지다. 아무리 좋은 병사가 있어도 군량이 끊기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듯, 소화력이 약하면 좋은 음식을 먹어도 기혈이 모이지 않는다. "비위가 편안하면 백 가지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옛말이 그래서 나왔다. 당근이 소화불량과 오래된 설사에 쓰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손자병법 군형(軍形) 편은 이길 형세를 먼저 갖춘 뒤 적이 무너질 기회를 기다리라 했다. 병이 생긴 뒤 치료에 나서는 것은 전쟁이 터진 뒤에야 병사를 모으는 일과 같다. 면역력을 기르고 소화력을 높여 두는 일이야말로, 무너지지 않는 진지를 미리 쌓는 군형의 지혜다.

현대 영양학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근 100g에는 베타카로틴이 약 8천㎍ 들어 있어 비타민 A 하루 권장량을 훌쩍 넘긴다. 베타카로틴은 몸 안에서 비타민 A로 바뀌어 눈과 점막을 지키고, 루테인 같은 카로티노이드와 더불어 강력한 항산화 작용으로 세포의 산화를 늦춘다. 늙음은 세월보다 세포의 산화에서 온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과도함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양생의 핵심은 늙는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당근에는 혈압과 혈관을 돕는 칼륨, 혈당이 갑자기 오르는 것을 막고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펙틴, 간의 해독을 돕는 글루타티온도 들어 있다. 근래에는 팔카리놀(falcarinol)이라는 성분이 주목받는다. 영국 뉴캐슬대와 덴마크 연구진이 쥐에게 당근과 팔카리놀을 먹인 실험에서, 그렇지 않은 쪽보다 암 발병이 3분의 1가량 낮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연구진은 당근을 자르지 않고 통째로 익히면 팔카리놀이 25%가량 더 보존된다고 밝혔다.

베타카로틴은 물에 녹지 않고 기름에 녹는다. 그래서 생으로 먹으면 흡수율이 10% 안팎에 그치지만, 기름을 살짝 둘러 익히면 30~60%까지 오른다. 가열하면 단단한 세포벽이 부드러워져 흡수가 한결 쉬워진다. 땅의 기운을 품은 뿌리채소답게, 자극적으로 볶기보다 부드럽게 익히는 조리가 어울린다. 우리 조상들이 당근을 국과 찜, 나물, 전, 떡에 두루 쓴 데에는 이런 이치가 담겨 있다.

당근과 좋은 짝은 사과다. 당근의 카로틴과 사과의 비타민 C, 칼륨이 서로를 보완한다. 다만 당근에는 비타민 C를 산화시키는 효소가 있어, 생으로 함께 먹을 때는 살짝 익혀 효소의 작용을 누그러뜨리는 편이 낫다.

당근 수확 당근 수확

[연합뉴스 자료사진]

◇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당근 요리법

손자는 '병(兵)은 궤도(詭道)', 곧 전쟁은 속임수라 했다. 당근의 역사에도 그런 기만전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은 야간에 독일 폭격기를 정확히 요격했는데, 그 비결은 새로 개발한 항공 레이더였다. 영국은 이 기술을 감추려고 조종사들이 당근을 많이 먹어 밤눈이 밝아졌다는 선전을 퍼뜨렸고, 마침 부족하던 식량 사정 속에 당근 소비까지 끌어올렸다.

과장된 이야기였지만, 베타카로틴이 비타민 A로 바뀌어 야맹증을 막는다는 사실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당근은 조리법마다 다른 얼굴을 보인다. 맑은 당근국에서는 소고기와 무, 파를 받치며 자연의 단맛을 낸다. 사과와 견과를 곁들인 당근샐러드는 기혈을 보태면서 몸을 가볍게 하니, 병이 오지 못하게 막는 예방의 음식에 가깝다.

약한 불에서 천천히 익히는 당근조림은 기다림의 맛이다. 기름을 둘러 굽는 당근구이는 겉을 노릇하게, 속을 부드럽게 익혀 베타카로틴 흡수를 끌어올린다. 발효를 거치는 당근김치는 유산균과 베타카로틴이 만나 장을 돕는다.

당근주스는 태양과 흙, 바람과 시간을 함께 마시는 일이되, 손자가 지나침을 경계했듯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독이 된다.

노자는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큰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작은 불균형이 오래 쌓여 모습을 드러내고, 건강 또한 작은 습관이 모여 만들어진다. 손자가 꼽은 최고의 승리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듯, 최고의 양생은 병이 오기 전에 몸의 형세를 갖추는 것이다.

오늘 식탁 위의 당근 한 뿌리에는 태양의 색과 땅의 기운, 그리고 오래 이어져 온 양생의 지혜가 함께 담겨 있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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