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이야기 소묘⑧ 강물 바닷물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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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 칼럼] 이야기 소묘⑧ 강물 바닷물Ⅰ

문화매거진 2026-06-29 09:45: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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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 칼럼] 이야기 소묘⑦ 보물 찾기에 이어 
 

▲ 부산 을숙도대교 / 사진: 부산광역시 제공
▲ 부산 을숙도대교 / 사진: 부산광역시 제공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언어의 경계

부산 을숙도대교를 지나다 보면 대교 아래를 기준으로 왼쪽은 강물, 오른쪽은 바닷물이라는 기묘한 경계 지점을 만나게 된다. 부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이 남해와 이어지는 지점으로, 강물과 바닷물이 한자리에서 마주치는 이 장면은 한동안 나에게 꽤 흥미로운 질문을 품게 했다.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서부터 바닷물인지, 물이 가진 모호성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켰는데,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처럼 물은 본래 경계 짓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지 않았던가.

그도 그럴 것이 강물과 바닷물 사이에서 양쪽이 서서히 희석되는 공간이 존재하는데 이를 기수(汽水)라 부른다. 기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지대로, 계절과 강수량에 따라 그 범위가 계속 변하며 조수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1987년에 낙동강하굿둑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곳은 오늘 강물이었던 곳이 내일은 바닷물이 되면서 경계가 매일 달라졌던 것이다.

강물이 어디서부터 바닷물이 되는지, 그 분명한 경계는 자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어져 흐르는 물을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경계는 흐르고 섞이는데, 이름은 그것을 마치 처음부터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차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아니면 이름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우리는 말이 이미 나뉜 세계를 그대로 가리키는 것처럼 쓰지만, 어쩌면 순서는 반대일지 모른다. 말이 먼저 경계를 긋고, 우리는 그 경계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세계를 읽어온 것은 아닐까.

언어의 상호의존성

그렇다면 이름은 과연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강물이라는 이름을 사전에서 찾으면 ‘강에 흐르는 물’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 짧은 정의는 곧바로 ‘강’, ‘흐르다’, ‘물’이라는 세 단어로 갈라진다. 강은 바다로 향하는 경로를, 흐름은 액체의 움직임을, 물은 특정한 성질을 지닌 물질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단어들 역시 뜻을 닫아주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려 했을 뿐인데, 뜻은 계속 다른 단어들로 갈라지고 이어진다. 그렇게 사전의 뜻을 따라가다 보면, 강물에서 출발한 의미는 어느새 바다에 닿게 된다. 바다라는 단어를 다시 열어보면 그 안에는 물, 소금, 파도, 해안, 깊이 같은 말들이 놓여 있고, 그 말들을 또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다시 흐름과 물질, 땅과 물의 경계 앞에 서게 된다. 결국 바다를 설명하는 단어들 역시 강물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다시 강물과 만나게 된다. 뜻은 한 단어 안에 머물지 않고, 물처럼 이어지며 서로를 향해 흐른다. 그렇게 의미는 좀처럼 한 자리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여기서 강물이라는 글자와 소리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약속한 단어의 껍질이다. 그런데 그 글자가 가리키는 의미는 맥락에 따라, 말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강물이라는 글자는 같아도, 내가 떠올리는 강물과 네가 떠올리는 강물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각자의 기억과 경험에서 생겨나기도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단어가 애초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단어에 기대어 설명되고, 그 단어는 또 다른 단어에 기대어 설명되는 식으로 연쇄가 이어진다. 단어들은 서로를 설명하면서도 어느 하나의 의미로 완전히 닫히지 않으며 기수가 강물도 바닷물도 아닌 채로 그 사이를 흐르듯, 의미도 고정되지 않고 단어들 사이를 흐른다.

의미가 그렇게 한 자리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면, 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그것은 고정된 뜻을 명징하게 붙잡거나, 변하지 않는 의미를 소유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맥락 안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의미가 잠시 충분히 겹쳐지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완전히 포개진 것은 아니지만,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 만큼 겹쳐진 상태.

단어는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지만, 흘러가는 의미 위에 임시적인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것은 닫힌 칸이라기보다 느슨한 그물망에 가깝다. 의미는 그 안에 완전히 담기지 않지만, 단어라는 그물망에 잠시 걸리며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를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겹쳐진 의미 위에서 대화하고, 이해하고,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언어의 구조적 역설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이 언어가 지닌 가장 큰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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