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가 열린다.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이 107일 만에 종전 양해각서 체결로 가닥을 잡으면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재개되고 3000억달러 규모의 이란 재건 구상도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과 자본 흐름의 대전환기 속에서 한국 경제는 중동 해빙기에 유가 안정과 중동 신시장 개척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직썰〉은 창간 12주년을 맞아 거시경제·금융시장·건설·해운·조선·반도체·바이오·식품·유통 등 8개 핵심 경제·산업 분야의 실질적 기회와 리스크 요인을 입체적으로 진단한다. [편집자주] |
[직썰 / 손성은 기자] 미국과 이란이 휴전 및 후속 협상 원칙에 합의하면서 세계 경제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했다. 이번 합의는 단순한 군사 충돌 중단을 넘어 에너지와 물류, 산업 공급망의 재편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특히 협상 과정에서 최대 3000억달러 규모의 대이란 투자 구상이 거론되면서 중동 경제 질서에도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향후 60일 동안 진행할 후속 협상에서는 대이란 제재 완화와 경제 정상화, 호르무즈 해협 안정화 방안 등을 전방위로 논의할 전망이다. 협상 결과는 국제유가와 해상 물류망, 제조업 비용 구조를 비롯해 한국 경제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만큼 중동 정세의 안정 여부가 유가와 물류비, 수입물가, 환율, 경상수지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협상 타결은 비용 부담 완화와 공급망 정상화라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협상 결렬 시에는 고유가와 고환율, 물류 차질이라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3000억달러 재건 구상…중동 경제 재편 신호탄 되나
미국과 이란의 협상 과정에서는 최대 3000억달러 규모의 대이란 민간 투자펀드 구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양국은 제재 완화와 경제 정상화 방안을 포함한 후속 협상을 진행 중이며, 에너지와 물류, 산업 인프라 재건을 위한 대규모 투자 방안을 거론하고 있다.
아직 최종 합의 단계는 아니다. 투자 구조와 자금 조달 방식, 제재 완화 범위 등 핵심 내용은 향후 협상 결과에 따라 가변적이다. 다만 정유시설과 가스 생산설비, 발전소, 항만, 철도 등 국가 기간 인프라 재건이 주요 투자 대상으로 꼽히면서 시장의 관심이 쏠린다.
현재 거론되는 방안은 정부 재정 투입보다 미국과 중동 산유국, 글로벌 투자자금 등이 참여하는 민간 중심 투자 구조다. 구체적인 자금 조달 방식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에너지·물류·산업 인프라 복구를 위한 국제 투자 플랫폼 형태가 유력하다.
3000억달러는 단순한 전후 복구 자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세계 4위 수준의 원유 매장량과 2위 규모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이란이 국제 시장에 복귀하면 에너지 공급 구조와 물류 네트워크 전반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글로벌 자본과 기업들이 다시 중동 시장으로 향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호르무즈 정상화 기대…유가·공급망 재편 변수
이번 합의가 세계 경제에 미칠 파급력은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개방 지속 여부에 달렸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석유 물량은 하루 평균 2000만배럴로 전 세계 석유류 소비의 약 20%를 차지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하루 2090만배럴 안팎의 물량이 이 해협을 통과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동하는 핵심 해상 통로다. 봉쇄 우려가 커지면 국제유가뿐 아니라 해상 운임과 선박 보험료, 정유사 조달 비용이 동시에 치솟는다. 이는 다시 수입물가와 생산자물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비용 충격을 유발한다.
반대로 해협 운항이 안정되면 원유 수송 리스크 프리미엄이 내려간다. 국제유가와 운임, 보험료가 안정되면서 에너지 수입국의 비용 부담도 줄어든다. 원유와 나프타, LNG 가격 안정은 정유·석유화학·철강·운송·항공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의 원가 부담 완화로 직결된다.
이란 경제가 정상화 국면에 진입하면 공급망 변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원유 생산설비와 항만·철도 인프라를 복원하면 중동 원유 수출 경로와 물류 네트워크가 확대된다. 유럽과 아시아 제조업계가 에너지 조달선 다변화와 비용 안정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유가 안정 속 재건 시장 부상…한국 기업 손익 계산 분주
한국이 기대하는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유가 안정이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한국 원유 수입의 약 70%가 호르무즈 해협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원유 수입액이 줄어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개선에 기여한다. 달러 결제 수요 감소는 원·달러 환율 안정에도 긍정적이다.
에너지 가격 안정은 금융시장에도 대형 호재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완화되면 외국인 자금 이탈 우려가 줄고 증시와 채권시장 변동성도 낮아진다. 반면 중동 리스크가 재확산하면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되면서 환율 상승과 금융시장 불안을 부른다.
중장기적으로는 재건 수요 자체가 새로운 시장이다. 한국 기업들은 과거 이란 제재 완화 국면에서 정유·석유화학 플랜트와 발전소, 철도, 항만 사업 진출을 추진한 경험이 있다. 특히 플랜트와 에너지 인프라, 항만·철도 건설은 국내 기업들이 높은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다.
향후 제재 완화와 국제 금융망 복귀가 현실화하면 건설·플랜트·조선·기자재 업종을 중심으로 신규 수주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이란으로 재건 자금 유입이 본격화할 경우 과거 현지 사업 경험을 갖춘 국내 기업들의 참여 공간도 열린다. 다만 현재까지 한국 정부나 기업에 대한 공식 참여 요청은 없다.
정부도 중동 복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협력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전후 한국 기업의 중동 복구사업 참여와 포괄적 경제협력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한-중동 포괄적 경제협력팀’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다만 외교부는 “미·이란 협상 과정에서 거론된 3000억달러 투자 구상과 직접 연계된 조치는 아니다”라며 “투자 계획 자체가 아직 초기 단계이며 한국 측에 공식 참여 요청이 이뤄진 상황도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중동 해빙의 명암…향후 60일이 분수령
투자 구상을 섣불리 낙관하기는 어렵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3000억달러가 적지 않은 규모이지만 국제경제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절대적인 영향력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누가 자금을 부담하고 어떤 방식으로 투자할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짚었다. 이어 “과거에도 미국과 이란 간 합의가 정권 교체와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뒤집힌 사례가 있었다”며 “최종 협상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협상이 무산되면 중동 리스크는 다시 증폭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중동 정세가 악화하는 극단적 상황에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74달러까지 치솟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고유가는 수입물가 상승과 기업 비용 증가, 소비 둔화, 환율 불안으로 이어져 한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준다.
향후 60일 동안 진행할 후속 협상은 중동 해빙이 새로운 성장 기회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불확실성으로 남을지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협상 타결 시 유가 안정과 공급망 정상화, 재건 특수가 기대되지만 결렬 시 오일쇼크와 물류 차질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3000억달러 이란 재건 구상이 한국 경제에 기회가 될지, 독배가 될지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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