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 경쟁은 더 이상 누가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들었는가를 겨루는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는 누가 기술을 통제하고, 누구에게 접근 권한을 부여하며, 어떤 기준으로 신뢰를 판단하는가를 둘러싼 새로운 질서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의 최신 AI 모델 '클로드 미토스5'에 대한 수출 제한을 일부 완화한 것은 단순한 규제 조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 국적자의 접근을 전면 차단했던 미국은 이제 포천500 기업을 포함한 약 100개 기관과 기업에 한해 사용을 허용하기로 방향을 수정했다. 규제를 거둬들인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기술을 허용할 것인지를 더욱 정교하게 설계한 것이다.
이 변화는 AI 시대의 권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계를 많이 만드는 국가가 우위를 점했다면, 오늘날에는 첨단 AI를 누구와 공유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가가 주도권을 확보하는 시대가 됐다.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은 언제나 국가 전략과 함께 움직였다. 19세기 영국은 증기기관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숙련 기술자의 해외 이주를 제한했고, 미국 역시 냉전 시기에는 첨단 반도체와 슈퍼컴퓨터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했다. 당시에는 철강과 석유, 반도체가 전략 자산이었다면 지금은 AI 모델 자체가 전략 자산이 된 것이다. 기술은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국가가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 기술을 폐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완전한 봉쇄는 혁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현실을 미국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무제한 개방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기업과 기관, 검증된 인력에게만 문을 여는 방식으로 기술 경쟁력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확보하려는 전략을 택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신뢰'다. AI 시대에는 기술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국가와 기업이 신뢰할 만한 파트너인가가 기술 접근 권한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 공급망에서도, 첨단 반도체에서도, AI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시장경제의 언어로 설명되던 세계가 점차 안보와 신뢰의 언어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역량과 빠른 디지털 전환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AI 시대의 경쟁은 제조 역량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초거대 AI 모델을 개발하는 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반도체, 소프트웨어, 인재, 제도까지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돼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AI 인프라는 과거의 도로나 항만처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기반시설이 되고 있다.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 고성능 GPU를 확보하는 역량, 데이터센터를 신속하게 구축할 수 있는 제도, 개인정보와 AI 활용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규제 체계까지 모두 경쟁력의 일부다. AI는 알고리즘만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의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세계 주요 국가들이 AI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에 뛰어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전력망과 통신망, 반도체 공급망, 클라우드 서비스가 집약된 전략 거점이다. 과거 국가들이 항만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는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AI를 특정 산업이나 일부 기업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나 AI는 이미 금융과 제조, 의료, 교육, 국방, 행정까지 산업과 사회 전반을 연결하는 기반 기술이 되고 있다. 특정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쟁력 자체를 좌우하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속도의 차이다. 기술혁명은 언제나 예고 없이 방향을 바꿔왔다. 증기기관이 그랬고 인터넷이 그랬으며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따라잡겠다는 전략은 시간이 갈수록 비용이 커질 뿐 아니라 기회를 잃을 가능성도 높인다. AI 역시 초기 주도권을 확보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격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벌어질 수 있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규제를 완화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AI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관리하면서도 혁신은 지속시키겠다는 균형 감각이다. 기술을 지키기 위해 혁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혁신을 위해 안보를 희생하지도 않았다. 양쪽의 균형을 찾기 위한 정책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시 AI를 산업 정책의 일부로만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다. 에너지 정책과 교육 정책, 외교 전략, 산업 정책, 국가 안보를 하나의 큰 틀에서 연결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AI는 더 이상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축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패권은 연구실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더 많은 반도체를 확보했는지, 누가 더 큰 데이터센터를 세웠는지, 누가 더 우수한 인재를 길러냈는지, 그리고 누가 더 신뢰받는 국가와 기업으로 인정받았는지가 함께 승부를 가른다. 기술은 출발점일 뿐이다.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제도와 인프라, 그리고 국가 전략이 결국 미래의 경쟁력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규제 완화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다. AI를 둘러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고, 그 파장은 생각보다 오래갈 가능성이 크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그 질서의 참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뒤늦게 적응하는 추격자로 남을 것인가.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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