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응시하는 영화들, 그리고 암전된 극장 안에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
칸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목격한, 연대와 공감의 물결이 스크린 안팎을 물들였던 제79회 칸영화제의 장면들.
스텔란 스카스가드, 로라 반델 감독, 각본가 폴 라버티, 디에고 세스페데스 감독과
영화제 집행위원장 이리스 크노블로흐가 함께 자리했다. ©Lyvans Boolaky/Getty Images
“혐오와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한 공간에 모여 같은 영화를 함께 보고, 호흡과 심장박동을 같이하는 그 단순한 행위 자체가 감동적이고 보편적인 연대의 표현이라 믿습니다.” 제79회 칸영화제 개막을 몇 달 앞두고 발표된 박찬욱 감독의 심사위원장 수락 소감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힘에 대한 헌사처럼 다가왔다.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에 위촉되었다는 소식은 개막 전부터 국내 영화계의 뜨거운 화두였고, 영화제 첫날 팔레 데 페스티발에 도착한 순간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박찬욱 감독을 필두로 클로이 자오 감독과 각본가 폴 라버티, 배우 데미 무어, 스텔란 스카스가드 등으로 구성된 9인의 심사위원이 나란히 뤼미에르 대극장 레드카펫을 오르는 장면을 눈에 담은 순간, 비로소 제79회 칸영화제가 막을 올렸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다소 주춤했던 한국 영화의 존재감은 올해 반가운 이름들과 함께 다시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부터 연상호 감독의 <군체>, 정주리 감독의 <도라>까지 총 세 편의 장편영화가 각각 경쟁과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감독 주간에 초청되어 월드 프리미어로 관객과 만났다. 세 감독 모두 칸영화제와 깊은 인연을 이어온 이름들이지만, 특히 <곡성> 이후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 나홍진 감독의 경쟁 부문 진출은 일찍이 국제 영화계의 기대를 모았다. 주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장르영화를 초청하는 칸의 경향을 떠올릴 때, 괴수와 SF, 액션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호프>의 경쟁 부문 진출은 그 자체로도 이례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부푼 기대 속에서 한국 작품 상영의 포문을 연 <호프>는 유난히 정제되고 내밀한 서사가 주를 이룬 올해의 경쟁 부문 상영작 사이에서 내내 고요했던 뤼미에르 극장에 한차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비무장지대 인근 어촌 마을 호포항에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등장하고, 출장소장 ‘범석’(황정민)과 동네 청년 ‘성기’(조인성)’, 순경 ‘성애’(정호연)가 초토화된 마을과 깊은 숲을 오가며 미지의 존재와 벌이는 치열한 사투가 2시간 40분 동안 스크린 위로 숨 가쁘게 펼쳐졌다. 치열한 티켓팅 끝에 드뷔시 극장에서 겨우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고, 상영 도중 세 차례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올 정도로 객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편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 이후 다시 한번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어, 감염자들이 지성을 공유하는 존재로 진화한다는 설정을 통해 기존 서사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감독 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도라>는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 연구를 주인공 ‘도라’(김도연)의 시선으로 다시 써나가며 여성의 욕망과 결핍, 성장의 문제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가져온다. <도라>로 처음 칸에 입성한 배우 김도연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주인공이 자신의 언어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는 연기로 그려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지난해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화두로 꼽았던 ‘자유, 욕망, 고통’이란 단어를 영화 안에 온전히 녹여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영이 끝나자 객석에 불이 켜지기도 전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고, 관객의 환호 속에서 눈시울을 붉히던 배우의 모습은 칸에서 목도한 단연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다.
함께 트로피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Amy Sussman
한국 영화의 열기가 한 차례 지나간 뒤, 상영관과 기자회견장을 밤낮으로 오가며 피부로 느낀 올해 영화제의 화두는 다름 아닌 정치적 목소리였다. 개막 첫날 진행한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는 영화와 정치의 관계를 묻는 외신 기자들의 첨예한 질문이 쏟아졌고, 이에 대해 박찬욱 심사위원장은 “예술과 정치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정치적 메시지가 예술적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라며 심사 기준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밝혔다. 올해 초 베를린 국제영화제부터 이어져온 이러한 문제의식은 올해 칸에서도 자연스럽게 제기되며 영화제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화두로 자리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정치적 메시지를 자신만의 미학으로 녹여낸 경쟁 부문 작품들과 수상 결과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본격화된 2022년을 배경으로 러시아 사회의 침묵을 응시한 작품 <미노타우로스>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안드레이 즈뱌 긴체프 감독은 연단에 올라 “이 학살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연방 대통령뿐”이라는 수상 소감을 전하며 전쟁 종식을 강력히 촉구했다. 침공 이후 고국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온 감독이기에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 소감이었다. 감독상을 수상한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파더랜드> 역시 분단 직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한스 치슐러)과 딸 ‘에리카 만’(잔드라 휠러)의 여정을 따라간다. 상영 이후 한동안 프레스룸은 온통 <파더랜드> 이야기로 가득했다. 전쟁 이후에도 남아 있는 역사적 책임과 치유의 가능성을 그간 파베우 감독이 고수해온 간결함의 미학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였다.
황금종려상은 루마니아 거장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피오르>에 돌아갔다. 영화는 노르웨이 사회에 정착한 루마니아계 복음주의 가족이 아동 학대 혐의로 국가기관의 개입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국가권력과 종교적 신념 사이의 충돌을 다룬 이야기는 오늘 날 세계 곳곳에서 심화되는 분열과 대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배우 틸다 스윈턴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은 문주 감독은 “<피오르>는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선언이자 관용과 포용, 공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며 뭉클한 수상 소감을 남겼다. 이로써 그는 2007년에 초청받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 이어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소수자성에 주목한 작품이 영화제 전반에 걸쳐 두드러졌다는 점 역시 올해 칸의 특징 중 하나였다. 경쟁 부문에서는 스페인 내전 시기부 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 세대에 걸친 퀴어 남성들의 삶을 엮은 스페인 감독 듀오 하비에르 칼보·하비에르 암브로시의 <블랙 볼>이 프리 미어 직후 장장 20분에 달하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화제를 모았고, <걸>과 <클로즈>로 잘 알려진 뤼카스 돈트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참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린 <카워드>로 호평받았다. 현장에서 뜨거운 인기를 체감했던 화제작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개막작인 <캠프 미아스마에서의 10대 섹스와 죽음>이었는데, 제인 숀브런 감독은 슬래셔 무비의 문법을 빌려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처음 마주하는 청춘의 혼란과 해방감을 대담하게 그려내며 퀴어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퀴어 서사가 더 이상 특정 장르나 독립된 부문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극과 전쟁영화, 스릴러, 코미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영화제 전반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서로 축하를 건네는 감동적인 순간. ©Andreas Rentz/Getty Images
주최국인 프랑스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국가가 일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올해는 일본 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진 해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상자 속의 양>부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첫 프랑스 영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후카다 고지 감독의 <나기 노트>까지 경쟁 부문에만 총 세 편의 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하마구치 감독은 긴 러닝타임을 인물 사이의 대화로 온전히 채우는 기존의 형식을 유지한 채, 프랑스의 한 요양원을 무대로 돌봄과 관계의 의미를 탐구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 여성의 만남을 섬세한 호흡으로 그려낸 두 배우, 오카모토 다오와 비르지니 에피라가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며 감동적인 장면을 남겼다. 이뿐 아니라 소데 유키코 감독의 <밤의 모든 연인들>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시대극 서스펜스 <사무라이와 죄수들>이 칸 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되는 등 주요 섹션 전반에 걸쳐 일본 영화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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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보낸 일주일은 영화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전 세계에서 모여든 영화인들과 느슨한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밤늦게 상영을 마치고 크루아제트를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는 달뜬 목소리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암전된 극장 안에서 같은 곳을 응시하며 웃음과 눈물을 나누는 경험 역시 그러한 순간의 일환이었다.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에 여 전히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올해 칸영화제에서 만난 작품들이 전쟁과 분열, 혐오와 불안이 짙게 드리운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응시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더 강력한 연대의 방식일 수 있음을 매일같이 실감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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