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바순의 묵직한 저음이 바닥을 쓸다 이내 날카로운 고음으로 솟구친다. 기나긴 호흡은 독백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혀를 굴리는 재빠른 아티큘레이션은 타악기에 버금가는 역동적인 리듬을 직조한다.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수석 바수니스트 유성권이 피아니스트 문정재와 호흡을 맞춘다.
전반부는 20세기 프랑스 작품 두 편과 윤이상의 독주곡으로 짜였다. 첫 곡은 외젠 보자(Eugène Bozza)의 ‘레치타티보, 시칠리안느와 론도(Récit, Sicilienne et Rondo)’다. 레치타티보는 말하듯 자유로운 선율로 출발한다. 바순 특유의 낮은 음색이 짧은 문장과 쉼을 오가며 무게를 잡는다. 시칠리안느에서는 흔들리는 6박 계열 리듬 위로 부드러운 선율이 떠오른다. 론도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급격히 밝아진다. 민첩한 패시지, 넓은 도약, 또렷한 아티큘레이션이 이어져 독주자의 손놀림과 호흡 통제를 시험한다.
앙리 뒤티외(Henri Dutilleux)의 ‘사라방드와 행렬(Sarabande et Cortège)’은 느린 춤곡과 활기찬 행진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라방드는 절제된 박동과 어두운 화성으로 바순의 중저음을 깊게 파고든다. 코르테주에서는 피아노 리듬이 추진력을 높이고 관악 선율이 짧게 튀어 오르며 색채를 바꾼다. 문정재의 건반은 독주선율과 대등한 파트너로 움직인다. 유성권의 긴 프레이즈에 긴장과 속도를 보탠다.
전반부 마지막은 윤이상(Isang Yun)의 ‘모놀로그(Monolog)’다. 피아노 없이 바순 한 자루만 남는 순서다. 연주자의 호흡과 음색 변화가 중심이다. 낮은 음역의 묵직한 울림과 갑작스러운 도약, 길게 끌어올리는 선율 등 하나의 내면극을 이룬다. 자기 안에서 솟는 질문과 응답이 두드러진다. 유성권에게는 음 하나의 시작과 끝, 침묵의 길이, 숨의 압력까지 음악으로 조직해야 하는 고난도 레퍼토리다.
휴식 뒤에는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환상소곡집 Op.73(Fantasiestücke, Op.73)’이 오른다. 원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해 쓴 세 곡은 바순 편성에서도 자주 연주된다. 1곡 ‘부드럽게, 표현을 담아(Zart und mit Ausdruck)’는 따뜻한 선율과 유연한 호흡이 핵심이다. 2곡 ‘생기 있고 가볍게(Lebhaft, leicht)’는 짧은 음형이 경쾌하게 오가며, 3곡 ‘빠르고 불같이(Rasch und mit Feuer)’는 앞선 두 곡의 에너지를 거세게 끌어올린다. 슈만의 악보에서는 관악기와 피아노가 한 문장을 나눠 말한다. 유성권이 노래하는 선율을 길게 이으면 문정재가 화성과 리듬으로 정서를 확장한다.
로제 부트리(Roger Boutry)의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충돌(Interférences pour basson et piano)’은 제목이 암시하듯 두 악기의 마찰과 반응을 중심에 세운 작품이다. 불규칙한 리듬, 날카로운 화성, 빠른 주고받기가 연주자를 압박한다. 바순은 짧게 끊는 음과 긴 선율을 교차시킨다. 피아노는 단단한 화음과 세밀한 리듬으로 맞선다. 유머와 긴장이 공존하는 현대 프랑스 관악어법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곡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의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장조 Op.168(Sonata for Bassoon and Piano in G Major, Op.168)’이다. 1921년 완성된 생상스 후기 실내악 가운데 한 편으로, 목관악기의 개성을 세심하게 살린 작품이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는 차분한 노래와 명료한 형식미를 품고, 2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찬도(Allegro scherzando)는 가벼운 리듬과 민첩한 움직임으로 표정을 바꾼다. 3악장 몰토 아다지오–알레그로 모데라토(Molto adagio–Allegro moderato)는 느린 서주에서 깊은 서정을 쌓은 뒤 밝은 종지로 향한다. 바순은 낮은 음역의 온기와 높은 음역의 가느다란 긴장을 오간다. 피아노는 투명한 화성으로 선율의 윤곽을 비춘다. 화려한 효과보다 자연스러운 호흡과 고른 음질이 중요해 유성권의 오랜 오케스트라 경험과 실내악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날 순서다.
16세에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에 최연소 입학한 유성권은 21세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수석으로 발탁되며 일찍이 재능을 증명했다. 당시 악단 최연소 단원 기록도 세웠다. 입단 반년이 지나기 전 종신 단원으로 임명되며 국제 관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는 객원 수석으로 연주했다. 국내에서는 고잉홈프로젝트 주요 음악가로 참여했고 KBS교향악단, 대전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인천시립교향악단, 심포니송 등과 협연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콰르텟, RSB 목관오중주, 이스트사이드 옥텟, 앙상블 클럽 등 실내악 무대도 꾸준히 찾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바순을 시작한 뒤 예원학교, 서울예고, 베를린 국립예술대에서 수석과 최고점 기록을 쌓았다. 2014년부터 베를린 국립예술대에 출강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정재는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학사·석사과정을 마친 뒤 실내악 최고연주자과정과 솔로 최고연주자과정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볼로냐, 프란츠 슈베르트, 미네르비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서울시립교향악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줄리아드 오케스트라, 볼로냐 심포니 오케스트라, 야나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하노버 오페라 오케스트라, NDR 라디오 필하모닉 무지크탁,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앙상블, 뉴욕 링컨센터 초청 무대에 섰고 도이치 그라모폰·유니버설 뮤직의 ‘옐로 라운지’, 해외문화홍보원의 ‘헬로, 미스터 케이!’에도 참여했다. 현재 SM엔터테인먼트 SM클래식스 대표, 신세계 프라퍼티 고문, 별마당도서관·스타필드 콘서트 음악감독, 앙상블 파체 멤버로 활동한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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