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 중기부가 직접 '창업 코치'가 될 필요는 없다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가 '모두의 창업'이라는 사업을 내놨다. 이름 그대로 온 국민을 상대로 한 창업 오디션이다. 정부가 직접 프로그램의 콘셉트와 틀을 짜고, 수많은 공공·민간 기관을 운영 조직처럼 줄 세워 예비 창업자를 뽑고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창업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은 원래 '액셀러레이터'라 불리는 민간 전문가들의 몫이었다. 액셀러레이터, 우리말로 창업기획자는 갓 출발한 스타트업을 찾아내 돈을 대고, 사무 공간과 멘토링을 제공하며, 다음 단계 투자자와 연결해 주는 민간 회사다. 말하자면 초기 스타트업의 전문 코치다. 그렇다면 정부 부처가 스스로 거대한 코치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창업 생태계에서 정부의 역할을 두고 흔히 쓰는 비유가 있다. 정부는 직접 경기에 뛰는 선수가 아니라, 좋은 경기장을 만드는 주최자라는 것이다. 창업 생태계를 연구한 학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에릭 스탐은 주인공인 기업가를 가운데 두고, 정부와 지원 기관은 그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환경을 대주는 '공급자'에 가깝다고 봤다. 대니얼 아이젠버그 역시 정부가 창업가를 직접 찍어내려 하기보다, 창업가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가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큰 방향을 정하고, 민간이 떠안기 버거운 초기의 위험을 덜어 줄 종잣돈을 대고, 공공기관과 대기업·대학·투자자·전문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여는 것이다. 여기서 종잣돈은 흔히 '마중물'에 비유된다.
펌프에서 물을 끌어 올리려면 먼저 한 바가지 물을 부어야 하듯, 민간 투자가 따라붙도록 정부가 먼저 붓는 작은 돈이다. 반대로 정부가 기획부터 실행까지 전부 직접 쥐면 단기적으로는 일이 빨라 보여도, 민간의 실험과 전문성은 위축되고 생태계는 다양성을 잃는다.
이 역할 분담을 비교적 잘 보여 준 사례가 '팁스'(TIPS)다. 팁스는 민간이 운전대를 잡는 기술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다. 창업기획자나 초기 전문 벤처캐피털(VC, 갓 시작한 기업에 투자하는 전문 투자사), 기술 대기업 같은 민간 운영사가 될성부른 기술 스타트업을 먼저 골라 투자하고 추천하면, 정부가 검증을 거쳐 연구개발비와 사업화·해외 진출 자금을 얹어 주는 구조다. 중기부에 따르면 팁스는 2013년 시작된 이후 2천7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을 지원했고, 이들이 끌어모은 다음 단계 투자만 13조원에 이른다.
물론 팁스도 완벽하지 않다. 수도권에 지원이 쏠리고, 운영사끼리 실력 차가 크며, 추천 권한이 일부에 몰린다는 지적이 있다. 그럼에도 팁스가 대표 창업 정책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정부가 민간을 밀어내지 않고, 민간이 옥석을 가리는 안목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정부의 자리는 선수가 아니라 경기장
문제는 '모두의 창업'이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점이다. 부처가 프로그램의 틀을 직접 짜고, 예비 창업자를 직접 뽑고, 키우는 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공공과 민간을 자기 사업의 하부 조직처럼 배열한다. 이는 부처 하나가 통째로 거대한 액셀러레이터가 되는 모습에 가깝다. 올해 불거진 자료 유출 논란이나 졸속 기획 논란을 다 접어 두더라도, 더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이렇게 현장 깊숙이 내려와 직접 선수로 뛰는 것이 과연 정부가 할 일인가.
사실 한국 창업 생태계는 이미 '관 주도'의 명암을 오래 겪어 왔다. 2025년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창업 지원 사업을 모은 자료를 보면, 101개 기관이 429개 사업을 벌였고 예산은 3조2천940억원에 달했다. 돈을 빌려주는 융자부터 사업화, 기술 개발, 공간 제공과 보육, 해외 진출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공공 예산이 촘촘히 깔려 있다.
이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창업 초기에는 정보가 부족하고 실패 위험이 크기 때문에, 공공 자금의 마중물 역할은 분명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공공 예산이 커질수록 정부와 민간의 역할 경계는 더 또렷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거꾸로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공공이 사업을 발주하면, 다시 공공 영역의 실행 조직이 그 사업을 따내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는 사이 민간 액셀러레이터는 공공기관과 같은 운동장에서 창업가 육성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데 이 경쟁은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다. 예산, 운영비, 공간, 행정 네트워크 어느 것을 봐도 공공기관과 그 산하 기관이 민간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경쟁의 기준 자체가 바뀐다는 점이다. 원래 초기 기업을 키우는 핵심은 창업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업 모델을 함께 다듬고, 시장과 투자자를 연결해 주는 밀도 높은 1대 1 코칭에 있다. 그러나 공공 조직과 맞붙는 환경에서는 이런 전문성보다 더 큰 공간, 더 많은 행정 인력, 더 낮은 운영 단가가 경쟁력이 된다.
창업자를 얼마나 잘 키워 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큰 시설을 갖췄고 얼마나 싸게 대규모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느냐가 앞선다. 그 결과 덩치를 한껏 키운 일부 기관만 살아남고, 작지만 날카로운 전문성을 지닌 민간 플레이어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육성이 전문가의 코칭 경쟁이 아니라, 인프라와 저가 단가의 경쟁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 무대를 짜는 일과 선수로 뛰는 일은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중기부가 직접 하나의 창업기획자처럼 나설 이유는 없다. 창업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정부는 오히려 더 큰 판을 봐야 한다. 민간 액셀러레이터, 대학, 기술지주회사, 지역 투자사, 대기업, 사회적 가치를 좇는 임팩트 투자사, 분야별 전문 기관이 저마다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로 우수한 예비 창업자를 발굴하고 키울 수 있도록 예산과 제도를 짜는 일이다.
특히 민간이 혼자서는 손대기 어려운 자원을 이어 주는 것이야말로 부처가 할 일이다. 이를테면 공공이 쥔 데이터, '규제 샌드박스'(새로운 사업을 일정 기간 규제 없이 시험하게 해 주는 제도), 정부·공공기관이 제품과 서비스를 사 주는 공공조달, 대기업이 가진 기술 실증 설비, 해외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정부가 무대의 주연을 꿰차기보다, 좋은 배우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도록 무대와 조명과 관객을 마련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정부가 창업에서 손을 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정부의 역할이 더 정교해져야 할 때다. 예산을 나누는 방식, 민간 운영사를 고르는 기준, 성과를 재는 잣대, 실패를 너그럽게 허용하는 제도, 지역과 분야의 쏠림을 줄이는 장치가 모두 한 단계 정밀해져야 한다. 다만 그 모든 설계의 방향은 민간을 대신하는 쪽이 아니라 민간을 키우는 쪽이어야 한다.
창업 생태계는 한 부처의 대표 사업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창업자는 저마다 다른 문제의 현장에서 태어나고, 좋은 투자자는 각자의 관점과 위험 감수 속에서 길러진다. 생태계의 힘은 수많은 민간 주체가 쌓아 올린 시행착오에서 나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정부 프로그램이 아니라, 더 정교한 역할 분담이다. 공공은 공공이 해야 할 일을, 민간은 민간이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 가르마가 흐려질수록 창업 지원은 전문성의 경쟁이 아니라 예산과 인프라의 경쟁으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중기부가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스스로 창업 코치가 되는 일이 아니라, 민간 창업기획자들이 오래도록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되살리는 일이다. 중기부가 직접 창업기획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세계를 휩쓸만한 K스타트업은 이러한 과정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순열 공익법인 임팩트투자 NGO 큐네스티 대표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