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국가는 시민을 버렸다. 다시 돌아온 국가는 남아 있던 시민을 심판했다."
1950년 6월, 이승만 정부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다리가 끊겨 점령된 도시에 고립된 사람들, 이들이 바로 '잔류시민'이었다. 석 달 뒤 서울을 되찾은 정부는 북한군 치하에서 살아남은 이 시민들을 '부역자'로 지목해 법정에 세웠다. 이양구의 신작 '잔류시민'(6월 6∼14일, 대학로극장 쿼드)은 바로 이 모순에서 출발한다.
1950년 6월, 서울은 전쟁의 속도 앞에서 무너졌고 국가는 가장 먼저 후퇴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던 시민들은 폐허가 된 도시 안에 남겨졌다. 가족과 생계를 지키기 위해 머물 수밖에 없던 사람들, 점령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이념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돌아온 국가는 그들을 법정에 세웠다. 도망가지 못한 일은 죄가 되었고, 살아남은 일은 처벌의 이유가 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된 것은 전쟁이 터진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다. 이 법은 단심제를 규정했고, 판결에서 양형 이유를 적지 않아도 무방하게 했다. 단 한 차례의 재판으로, 그것도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사형이 선고될 수 있었다. 소극적인 협조 행위에도 중형이 떨어졌고, 정부가 설치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처벌을 주도했다.
연극 '잔류시민'은 한국전쟁기 부역자 재판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국가와 법이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을 묻는다. 그리고 그 기준 앞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 균열을 무대로 불러온 20년
이양구는 지난 20여년간 한국 사회의 예민한 균열을 무대 위로 불러온 극작가이자 연출가다. 평택 기지촌 여성, 쌍용차 해고노동자, 검열과 블랙리스트, 노조파괴 컨설팅, 공공극장 논쟁 등 폭넓은 사회적 이슈를 다뤄 온 그의 작업은 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가해를 작동시킨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고발했다.
그러나 그의 연극을 그저 '사회성 강한 작품'이라고만 생각하면, 그의 작업이 지닌 고유한 결을 놓치게 된다. 법과 제도가 인간을 분류하고 배척하는 과정을 통해 이양구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잔류시민'은 최근 이양구의 문제의식이 가장 또렷하게 응축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잔류시민'은 2016년 연우무대 40주년 기념작으로 초고를 완성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무대와 인연이 닿지 못한 채 10년이 흘렀고, 올해 연우무대 50주년 기념작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초고의 제목은 유병진 판사의 회고록 제목을 딴 '재판관의 고민'이었다.
유병진은 실제로 부역자 재판을 맡았던 판사다. 그는 북한 점령 하의 파출소에서 심부름하고 사람들의 집을 알려준 행위가 우파 인사 살해 방조로 과장돼 법정에 선 14세 소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요된 상황에서 법을 지킬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기대가능성'의 논리를 앞세운 판결이었다. 그가 재판 과정에서 겪은 고민을 적은 책이 바로 '재판관의 고민'이다.
"초고에서는 판사처럼 평균적인 인간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의 윤리와 고뇌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잔류시민'에서는 판사가 시민들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평범한 시민의 눈높이에 도달하는 이야기로 내용이 많이 바뀌었어요. 재판관 개인의 고뇌보다는 시민의 입장과 관점이 중요해진 거죠."
작품의 바탕에는 형법의 '기대 가능성'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기대 가능성이란 어떤 상황에 놓인 인간에게 다른 행동을 기대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 법리다.
"기대 가능성 이론이라는 게 있어요. 어떤 강요된 상황에서 그 사람이 과거에 한 행동과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느냐는 거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는 쉬워요. 그런데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도 과연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그 지점을 말하고 싶었어요."
◇ 법학도가 바라본 법의 허약함
이양구가 이러한 질문에 민감한 데에는 법학도로서의 시간이 있다. 법학과에서 연극과로 방향을 바꾼 그는 대학 시절 형법과 헌법, 행위론을 공부했다. 그에게 법과 제도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었다.
그가 작가로서 법을 다룰 때 주목하는 부분은 법의 견고함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복잡한 조건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법의 허약함이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상황과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양구는 법의 판단과 인간의 현실 사이에 생기는 균열에 주목했다.
이러한 감각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활동을 하면서 더욱 구체화됐다. 이양구는 2017년 8월부터 2018년 6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상근직으로 일했고, 이후에도 2023년까지 비상근 자문위원으로 후속 조치와 제도 개선 과정에 참여했다.
"문화체육관광부로 매일 출퇴근하던 시기에는 연극 작업을 못 했어요. 그렇게 조직을 경험했던 건, 제게 좀 특별했어요. 연극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이 조직 내부에서 사회적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요."
이 시기에 이양구가 경험한 것은 권력의 폭력만이 아니라, 조직이 움직이는 방식, 문서가 만들어지는 과정, 책임이 분산되거나 이양되는 구조, 제도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언어들이었다. 예술가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행정의 심층부에서 그는 조직의 내부 생태를 가까이서 지켜본 셈이다.
상근직을 끝내자마자 이양구는 인천시립극단의 '너의 후일은'(2018), 경기도립극단의 '끌 수 없는 불꽃'(2019)을 썼고, '이게 마지막이야'(2019, 이연주 작), '집집: 하우스 소나타'(2021, 한현주 작)에서는 직접 연출을 맡았다.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한국연극 베스트7, 올해의 연극 베스트3, 레드어워드에서 굵직한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백상예술대상 연극상과 대산문학상을 휩쓸었던 '당선자 없음'(2022)을 기점으로, 이양구의 질문은 보다 분명해졌다. 그는 사건의 결과보다 그 과정에 자리한 사회구조의 작동 원리와 판단의 기준, 본질, 개념과 정의를 구조적으로 바라보았고, 법과 제도 안에서 시민이 겪는 고통을 한층 깊이 있게 다뤘다. 해방 직후 헌법과 국가의 판단 기준을 다룬 '당선자 없음'에 이어, '당연한 바깥'(2024)은 탈북 브로커의 여정을 통해 국경과 이념, 신분의 경계 바깥에 놓인 삶을 보여줬다.
◇ 사라진 마을에서 시작된 연극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법과 국가와 제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양구가 연극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그의 초창기 연극은 오히려 법의 언어와는 가장 먼 곳, 사라진 마을과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에서 시작됐다.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별방'이 당선되면서 이양구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그는 대학 졸업 작품으로 '핼리혜성'(2007)을 썼다. 두 작품은 모두 어린 시절에 살았던 수몰된 마을을 소재로 했고, '별방'은 그가 태어난 마을의 실제 이름이기도 했다.
"처음엔 연극이 무슨 사회적 메시지처럼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제게 연극은 시간이 흘러서든, 이별해서든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이나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해 주는 매개였죠. 김형기 교수님은 제 초창기 작품을 보시곤, 수몰된 마을처럼 사회적인 이슈를 순수한 가족사로만 그렸다면서 꽤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었어요. 그건 제가 잘 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제 관심사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극작 초기에 그가 붙들고 있던 것은 긴장감 있는 사건보다 아련한 기억의 풍경이었다. 유년의 기억, 가족의 부재, 돌아갈 수 없는 장소를 향한 그리움으로 작품을 썼고, 적어도 그 시기의 극작은 이양구에게 애도에 가까웠다. 사라진 장소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내는 일, 그것이 그가 연극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 출발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내려는 대상이 수몰된 고향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로 넓어졌을 뿐이다. '잔류시민'에서 이양구가 법정에 다시 세우는 것은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처벌받고 잊힌 이들, 곧 국가가 두 번 버린 시민들이다.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한 극작가의 오랜 애도가, 이제 한 시대의 잊힌 얼굴들을 향하고 있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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