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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한국 경제는 좋아 보인다. 5월 수출은 877억5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였고 올해 수출도 반도체 호조에 힘입어 크게 늘 전망이다. 코스피도 9000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불안하다. 5월 반도체 수출은 전체 수출의 42%를 넘었고 주가 상승도 대형 반도체주가 이끌었다. 수출과 증시가 모두 반도체 한 엔진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그 엔진이 흔들리면 경제 전체가 함께 흔들릴 수 있다.
대외 환경도 예전과 다르다. 한때 세계 경제의 문법은 자유무역이었다. 싸게 잘 만드는 곳에서 만들고 필요한 곳에 팔면 됐다. 이제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에너지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안보이고 외교이며 전략무기다. 미국은 막대한 보조금과 세금혜택을 쏟아붓고 중국은 내수시장과 원자재 공급망을 무기로 삼는다. 유럽은 탄소 규범으로 국경을 다시 긋고 있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개방형 경제로서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한 나라다. 60개국 이상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자유무역의 대표 수혜국이었지만 보호무역이 되살아나면 큰 피해국이 될 수 있다.
안쪽의 균열도 깊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높은 가계부채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부담으로 남아 있다. 민간소비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에너지 자급률은 6%대에 불과하다. 원자력을 포함해도 19%에 그친다. 여기에 경직된 노동시장, 과도한 규제, 반기업 정서가 겹쳐 있다. 중동 불안은 유가를 흔들고 유가는 물가와 금리를 자극하며 금리는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충격이 다른 충격을 부르는 구조다.
더 큰 걱정은 위기 대응 수단 자체가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정과 금융은 원래 소방수다. 불이 났을 때 물을 뿌리고 시장이 얼어붙을 때 온기를 넣는 장치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2020년부터 이어진 코로나19 위기 때 한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평소 쌓아둔 재정 체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소방차 물탱크를 평소 다 써버리면 진짜 불이 났을 때 쓸 물이 없다. 지금 재정은 그런 상태로 가고 있다. 재정위기의 첫째 근거는 증가 속도다. 좁은 의미의 나랏빚인 국가채무 D1만 봐도 2024년 1175조원에서 2025년 1304조5000억원으로 약 129조원 늘었다. GDP 대비 비율도 46.0%에서 49.0%로 3.0%p 뛰었다. 일반정부 부채 D2, 공공부문 부채 D3, 공적연금 충당부채까지 고려한 광의의 부채 D4까지 어떤 지표를 보더라도 증가 경로가 가파르다.
둘째, “정부 자산이 많으니 순부채는 괜찮다”는 주장도 위험하다. 정부 자산 가운데 상당 부분은 국민연금 등 공적기금 자산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정부가 마음대로 꺼내 쓰는 비상금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 돈이다. 자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 부담이다.
셋째, 미래 세대까지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공무원·군인·사학연금과 국민연금의 미적립 부채를 합친 넓은 의미의 나랏빚으로 보면 GDP 대비 180% 안팎에 이른다는 추정도 나온다. 유럽연합의 장기 재정 건전성 지표인 S2 지수로 봐도 한국은 14% 수준이다. 현 제도를 유지하려면 앞으로 세금을 GDP의 14%만큼 더 걷어야 한다는 뜻이다. 남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의 위험선 16%에 매우 가깝다.
금융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한국 기준금리는 미국보다 1%p 이상 낮다. 금리를 내리면 내수와 부동산에는 숨통이 트일 수 있지만 자본 유출과 환율 불안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금리를 높게 유지하면 가계와 자영업자, 한계기업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자 외국인 자금 약 40조원이 이탈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매도 물량을 40조원대 주식 신용 잔고를 활용한 개인 투자자들이 받아냈다는 점이다. ‘빚투’는 주가가 오를 때 용기처럼 보이지만 꺾이면 반대매매와 가계 손실로 바뀐다.
지난 16일 ‘힘의 시대, 문명의 재편: 누가 신세계를 설계하는가’를 주제로 열린 ‘제17회 이데일리 전략포럼’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세계는 이미 달라졌는데 우리의 정책 방식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재정 착시와 미래 세대 부담에 대한 경고를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글로벌 안보경제 시대에는 기업 경쟁력이 기술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 중국의 원자재 통제는 곧바로 우리 기업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법인세, 상속세, 노동 규제, 상법과 노사관계 입법이 끊임없이 정치 쟁점이 된다. 이것이 계속되면 좋은 기업은 떠나고 청년 일자리와 세수도 줄어든다. AI 전환도 늦출 수 없다. 공공 데이터 개방, 산업 데이터 표준화, 인력 양성, 초기 수요 창출이 함께 가야 한다.
이번 전략포럼을 계기로 정부, 국회, 언론, 학계 및 연구계가 진영 간 이해관계를 제쳐 두고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상설 소통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정책 입안과 평가 시 모든 지표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증거 기반 정책결정 체제’를 제도화해야 한다. 그래서 정책을 만들기 전에 숫자로 검증하고 시행 후에는 효과를 과학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복지정책은 실제로 누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험해야 한다. 조세정책은 성장과 분배, 세대 간 부담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재정정책은 1년 예산이 아니라 10년, 30년 뒤 청년 세대의 부담까지 보여줘야 한다. 정책평가연구원이 만든 ‘나라살림 게임’ 같은 도구도 더 넓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직접 세금을 올리고 지출을 줄이며 나라 살림의 결과를 확인해 보면 재정 논쟁의 실체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말로는 감세와 복지 확대와 재정 건전성을 동시에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는 거짓말을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는 강점이 많다. 세계적 기업이 있고 숙련된 인력이 있으며 빠른 기술 적응력도 있다. 그러나 강점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재정 체력을 회복하고 금융 불안을 낮추며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경제의 상태를 진영이 아니라 데이터로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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