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천장에서 길게 늘어진 왕골 다발이 관람객을 맞는다. 바싹 마른 줄기의 연갈색 표면, 손가락 사이에서 꼬이는 섬유, 촘촘한 무늬가 강화도 석모리의 하루를 불러낸다. 한때 “송둥이 짜시꺄”는 안부이자 노동 여부를 묻는 말이었다. 완초로 엮은 함을 짜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생계와 혼수, 이웃 품앗이의 기억이 스며 있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선정한 석모리왕골단 기획 '송둥이 짜시꺄'가 내달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KCDF갤러리 1전시실에서 펼쳐진다. 2026 공예주간 기간과 겹치는 행사에는 창작자 18명이 제작한 생활 기물과 조형물 50여 점이 소개된다.
◇안부 한마디에 담긴 마을의 생업
‘송둥이’는 완초를 엮어 만든 함을 가리킨다. 과거 강화 주민에게 제작 행위는 취미나 여가보다 집안 살림을 지탱하는 일거리였다. 누군가 함을 짜고 있는지 묻는 인사는 건강 상태와 하루 일과, 경제활동을 살피는 방식이기도 했다.
석모리왕골단이라는 이름에는 재료인 왕골, 전수 터전인 석모리, 사람들의 연대를 뜻하는 ‘단’이 담겼다. 구성원은 민화, 라탄, 가구조형, 디자인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다. 공유한 기술 기록을 익힌 뒤 각자의 감각을 색채, 구조, 비례, 표면으로 번역한다.
한 명의 장인이 지식을 전달하고 나머지가 따르는 수직형 계보와는 성격이 다르다. 배운 과정을 문서화하고, 동료가 놓친 손동작을 보완하며, 새 참여자에게 다시 알려주는 순환 구조에 가깝다. 개인 숙련도보다 서로 확인하고 고쳐주는 관계가 전승의 토대가 된다.
◇아침부터 밤까지 따라가는 손일의 시간
공간 구성은 강화 완초공예가의 하루를 아침, 낮, 저녁, 밤 순서로 풀어낸다. 입구에 매달린 마른 줄기는 재료 준비가 시작되는 풍경을 환기한다. 장식용 연출보다 노동 현장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방문자는 작품을 보기 전 원료의 길이와 질감부터 마주하게 된다.
아카이빙 구역에서는 옛 제작자의 일과를 사진과 실물로 살핀다. 재료를 손질하는 자세, 바닥에 앉아 섬유를 다루는 몸짓, 살림집 안에서 작업과 가사가 섞였던 생활상이 나란히 드러난다. 완성품만 진열하는 방식보다 하나의 물건에 투입된 시간과 신체 움직임을 읽게 한다.
중간 체험 구역에서는 ‘군일’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왕골을 비벼 긴 줄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힘이 고르지 않으면 굵기가 달라지고, 비트는 방향이 흔들리면 일정한 꼰날을 얻기 어렵다. 짧은 경험만으로도 반복 노동에 필요한 집중력과 손끝 감각을 짐작하게 된다.
◇함·방석·화문석, 생활 기물의 오래된 역할
전통 계열에는 송둥이, 접시, 좌구, 화문석이 등장한다. 저장과 운반, 상차림, 앉는 자리, 실내 장식에 쓰였던 물품들이다. 촘촘한 짜임은 형태를 유지하는 기능을 맡고, 문양은 집안의 취향이나 사용 목적을 드러냈다.
왕골은 마른 뒤에도 특유의 탄성을 남긴다. 엮는 간격이 좁을수록 면이 단단해지고, 굵기와 방향에 따라 표면 리듬도 달라진다. 납작한 자리는 넓은 평면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며, 뚜껑이 있는 수납함은 몸체와 덮개의 치수가 정교하게 맞아야 한다.
생활용품이라는 성격도 빼놓기 어렵다. 손에 닿는 가장자리는 거칠지 않아야 하고, 바닥은 쉽게 기울지 않아야 하며, 내부에는 물건을 넣고 꺼내기 편한 여유가 필요하다. 아름다움과 쓰임이 분리되지 않는 이유다.
◇스툴과 모빌로 옮겨간 골풀의 언어
응용 작업은 전통 형식의 복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툴, 모빌, 오브제, 자연석과 꼰날을 엮은 입체물은 익숙한 재료를 낯선 크기와 구조로 바꾼다. 낮은 방석에 쓰이던 직조법은 가구 표면으로 이동하고, 일정한 문양은 공중에서 움직이는 조각으로 변한다.
민화 경험은 색면과 상징 문양에서, 가구조형 감각은 하중과 비례에서, 라탄 작업의 습관은 선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디자인 언어가 더해진 결과물은 반복되는 격자나 꽃무늬를 확대하거나 일부를 비워 여백을 강조한다.
자연석을 감싼 꼰날은 부드러운 식물 섬유와 단단한 광물의 차이를 부각한다. 무게감 있는 돌이 바닥을 붙잡고, 가는 줄은 표면을 타고 돌며 형태를 감싼다. 재료 사이의 긴장은 골풀이 평면 직조에만 쓰인다는 고정관념을 흔든다.
◇신랑각시 무늬에 남은 혼례 문화
국가무형유산 완초장 이수자 박순덕은 24일 한 시간 동안 ‘신랑각시 무늬 함 뚜껑 짜기’를 시연한다. 1970~80년대 혼수품으로 제작된 수납함에 자주 쓰였던 도안이다.
신랑과 신부를 상징하는 문양은 결혼을 축하하는 장식이면서 당시 가족문화와 소비 관습을 기록한 생활사 자료에 가깝다. 혼례 준비 과정에서 어떤 물건이 필요했는지, 여성의 손노동이 집안 경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읽을 수 있다.
실연에서는 일정한 짜임 사이로 인물 형태를 넣는 방법이 공개된다.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색이나 굵기가 다른 재료를 끼워 넣어야 하므로 손놀림의 순서와 장력 조절이 중요하다. 완성된 무늬만 보던 관객에게 제작 원리를 가까이 확인할 기회가 된다.
◇보존보다 어려운 사람의 연대
전통기술은 숙련자 한 사람에게 의존하면 오래가기 어렵다. 배우는 이가 줄고, 재료 수급이 끊기며, 판매처가 사라지면 뛰어난 솜씨도 생활 속 자리를 잃는다. 석모리왕골단의 의미는 복원품 수량보다 교육과 창작, 기록을 담당할 사람들을 묶었다는 데 있다.
과거 여성들의 생업이 현대 문화공간에 소개되는 과정에는 경계할 부분도 있다. 고된 노동을 따뜻한 공동체 이미지로만 포장하면 제작자의 경제 현실과 신체 부담이 가려질 수 있다. 아름다운 문양 뒤에 반복 작업, 낮은 수익, 혼수 관습 속 성 역할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살펴야 한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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