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을 여는 붉은 보석
앵두보다 크고 자두보다 작은 체리는 여름을 여는 6월의 대표 과일이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붉은 빛깔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긴 겨울을 지나 햇살을 머금고 익어가는 체리는 전 세계인이 기다리는 초여름의 선물이다.
체리는 오래전부터 아름다움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붉은색은 생명력과 열정을 의미했고 탐스러운 열매는 풍년과 번영을 상징했다. 유럽의 옛 화가들은 정물화 속에 체리를 자주 등장시켰고 시인들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을 체리에 비유했다. 작은 과일이지만 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특별한 존재였던 셈이다.
그러나 체리의 진짜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에만 있지 않다. 체리 한 알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인류의 교역과 문화 그리고 음식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로마 제국이 사랑한 과일
체리의 고향은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 주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튀르키예 북동부 지역에는 지금도 야생 체리가 자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체리를 재배하고 있었지만 유럽 전역에 체리를 널리 퍼뜨린 주인공은 로마인들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의 장군 루쿨루스는 기원전 74년쯤 흑해 연안 도시 케라순트에서 체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 매혹적인 과일을 로마로 가져왔고 귀족들의 정원에 심도록 했다. 이후 로마 군단이 이동하는 곳마다 체리나무가 함께 퍼져나갔다고 한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연회가 끝난 뒤 체리를 디저트로 즐겼다. 로마 시인들은 체리의 달콤함을 노래했고 귀족들의 별장에는 체리 과수원이 조성되었다. 훗날 로마 제국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체리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에까지 뿌리를 내리게 된다.
흥미롭게도 영어의 체리라는 단어 역시 이 여정의 흔적을 담고 있다. 원산지 도시인 케라순트의 이름이 라틴어를 거쳐 오늘날의 체리라는 단어로 변화한 것이다. 과일 이름 속에 고대 도시의 기억이 남아 있는 셈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세계문화 연결
체리는 서쪽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동서 문명을 연결했던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아시아로도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체리를 귀한 과일로 여겼다. 붉은색이 길상과 행운을 상징하는 문화와 맞물려 황실에 진상되는 과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나라 시절 문헌에도 체리를 황제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되었다. 특히 야마가타현은 일본 체리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일본인들은 체리를 초여름의 보석이라고 부르며 선물용 과일로 애용한다.
이처럼 체리는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문화와 문화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비단과 향신료 도자기가 이동하던 길을 따라 체리나무도 함께 이동했고 각 지역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체리를 받아들였다.
한 알의 체리가 만든 세계의 식탁
체리는 나라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식탁에 오른다.
프랑스에서는 체리를 넣어 만드는 전통 디저트 클라푸티가 유명하다. 달걀 반죽 위에 체리를 듬뿍 올려 구워낸 이 소박한 디저트는 여름이면 가정마다 등장하는 계절 음식이다.
독일에서는 검붉은 체리로 케이크를 만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랙포레스트 케이크에는 체리와 체리 리큐어가 들어간다. 숲을 닮은 초콜릿 케이크 속에 새콤달콤한 체리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낸다.
미국에서는 체리 파이가 국민 디저트로 사랑받는다. 7월 독립기념일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체리 파이를 굽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달콤한 체리 필링이 가득 담긴 파이는 미국 가정의 여름을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체리 수프를 즐긴다. 특히 헝가리의 차가운 체리 수프는 무더운 여름철 별미로 꼽힌다. 과일을 수프로 만든다는 발상은 낯설지만 새콤달콤한 맛 덕분에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중동 지역에서는 체리를 말려 저장하거나 고기 요리에 넣어 풍미를 더한다. 최근에는 체리잼·체리주스·체리 와인·체리 식초 등 다양한 가공식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 체리는 건강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체리의 붉은 색을 만드는 안토시아닌은 대표적인 항산화 성분이다. 또한 비타민 C와 칼륨, 식이섬유를 함유하고 있어 균형 잡힌 식생활에 도움을 주는 과일로 평가받는다.
특히 신맛이 강한 타트체리에는 멜라토닌 성분이 함유돼 있어 수면 관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운동선수들이 회복식으로 체리 주스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체리가 주는 가치는 계절성에 있다. 사계절 내내 다양한 과일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체리는 여전히 초여름을 대표하는 과일로 기억된다. 짧은 수확 기간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6월 초여름 햇살 아래 붉게 익어가는 체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인류의 긴 여정이 떠오른다. 흑해 연안의 작은 열매는 로마 군단을 따라 유럽으로 퍼졌고 실크로드를 건너 동아시아에 도착했다. 왕실의 식탁을 장식했던 과일은 오늘날 세계인의 간식이 되었고 각 나라의 문화 속에서 새로운 음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무심코 입에 넣는 체리 한 알에는 계절의 풍요뿐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문명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체리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여름의 문을 열며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은 붉은 보석인지도 모른다.
여성경제신문 전지영 푸드칼럼니스트(foodnetworks@hanmail.net)
전지영 세계식문화 칼럼니스트
식품영양학 전공 후 청와대 비서실 영양사를 거쳐 외식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 겸임교수 및 농식품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음식을 단순히 먹는 대상이 아닌 한 사회의 시간과 기억을 이어주는 언어로 바라보며 유엔식량기구(FAO)와 주요 언론에 칼럼을 연재해 왔다. 식탁 위 한 그릇의 음식에서 세계의 문화와 삶을 읽어내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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