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35역으로 그린 존재의 모호함…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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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35역으로 그린 존재의 모호함…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연합뉴스 2026-06-24 07:0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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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 라이트 동명 연극 각색…두산아트센터서 12년 만에 공연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단출한 무대에 단 한 명의 배우가 올라섰다. 혼자 여장남자를 연기하다가 여성을 연기하기도 하고, 90년대 인물이 됐다가 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도 묘사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냈다.

공연 개막을 하루 앞두고 23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시연된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는 1인 35역을 소화하는 배우를 통해 존재의 모호함과 복잡성을 그려냈다.

미국 극작가 더그 라이트의 동명 연극을 각색한 120분 길이의 1인극으로, 실존했던 인물인 '샤로테'(본명 로타르 베르펠데·1928∼2002)의 이야기를 다뤘다. 2013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초연됐으며, 2014년 재연 이후 12년 만에 돌아왔다.

샤로테는 히틀러의 나치 시대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시대를 산 성소수자다. 생물학적 남성이었으나 본인의 정체성은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여장을 하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동성애자인 미국의 작가 '더그'가 샤로테를 주인공으로 한 글을 쓰기 위해 그를 취재하면서 샤로테의 회상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강량원 연출은 12년 만에 작품을 다시 만들며 "초연 당시 트랜스젠더인 샤로테가 겪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에 주목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그의 내면에 다가가고자 했다"고 프로그램북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과 같이 이야기는 샤로테의 복합적 면모를 깊숙이 조명한다. 샤로테는 남성이지만 여성이기도 하고, 나치와 슈타지(동독의 첩보기관) 등에 폭력을 당한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슈타지에 동료를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스스로 아버지를 죽이고 소년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비(非)인간, 사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샤로테는 극 중 그가 수집한, 나치 시대나 동독 시대의 가구를 소개하며 "난 그 가구가 됐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가구와 오래된 축음기, 시계 등 샤로테가 수집하는 사물들은 기억과 경험, 역사 그 자체다. 또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취급받지 못한 그의 위치를 드러내며 그와 동일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사는 시대에 샤로테는 에디슨이 발명했다는 구시대의 축음기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는다.

샤로테의 수집품들은 작품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붉은 융단으로 도배된 무대는 그의 소중한 수집품들을 보관하는 '보석함'을 본떠 만들었다.

장호 무대디자이너는 디자인 노트에서 "세상의 분류법이 아닌, 나만의 분류법으로 '기억하기 위해' 소중하게 사물을 간직하는 보석함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품이 1인극 형식을 택한 의도는 명확하다. 특별한 위치나 분장 변화 없이 순식간에 여러 인물을 넘나들며 정체성을 전환하는 배우의 연기는 무(無)경계라는 주제를 부각한다. 한 명의 배우가 35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을 연기하며 기억 속의 구시대 인물과 현시점의 인물,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여자와 남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운다.

재연에 이어 12년 만에 출연한 지현준과 새롭게 합류한 배우 백석광이 샤로테 등 35인을 연기한다.

깊이 있는 침묵과 절제로 오래된 가구와 같은 샤로테를 표현한 지현준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백석광의 연기에서는 장애인인 샤로테의 친구 '알프레드'와 현대의 네오 나치 등 다양한 캐릭터를 분석한 흔적이 엿보였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제목 '나는 나의 아내다'의 의미는 극 후반부에 드러난다. 제목 문구는 마흔이 넘은 샤로테에게 그의 어머니가 '언제쯤 결혼할 것인지' 묻는 말에 대한 샤로테의 대답이다. 샤로테가 여러 성 역할과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대사다.

작품은 '존재를 규정하거나 분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연출은 "예술이 마주하는 존재는 대개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며 "예술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그 존재의 빛은 조금씩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두산아트센터에서 24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 공연한다.

fa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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