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가톨릭대학교 독립서점팀 김다현 김진서 오주은 이지원 이혜인 황정아】무대 위 배우가 서점 주인이 된다면 어떤 공간이 만들어질까. 서울 대학로 인근의 희곡 전문 독립서점 인스크립트는 그 물음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답이다.
배우이자 공동대표인 박세인·권주영이 함께 운영하는 이곳은 단순히 희곡을 판매하는 서점이 아니다. 활자로 잠들어 있던 희곡이 목소리를 얻고, 낯선 이들이 같은 문장 앞에 앉아 하나의 작은 공연을 완성하는 공간이다. 가톨릭대학교 독립서점팀은 두 공동대표를 만나 인스크립트가 품고 있는 이야기와 운영 철학을 들어봤다.
희곡 전문 서점의 탄생
인스크립트가 탄생한 배경에는 희곡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대형서점에 갔을 때 희곡이 놓여 있는 칸이 굉장히 조그맣고,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극을 오래 해온 두 배우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희곡을 무대의 재료로만 소비해왔을 뿐, 하나의 문학 장르로 온전히 마주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희곡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인스크립트의 출발점이 됐다.
서점 이름 ‘In Script’는 ‘희곡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름처럼 이 공간은 희곡이라는 장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트렌드 너머, 희곡을 찾는 이들
인스크립트가 문을 연 시기는 이른바 ‘텍스트힙(Text Hip)’ 현상이 확산되던 시기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두 운영자는 이 트렌드의 주류 안에서 희곡을 바라보지 않는다.
“희곡은 아직 발굴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는 문화 장르인 것 같아요. 텍스트힙이라는 말처럼 희곡도 조금 더 힙해지면 좋겠어요. ‘힙곡’이라고나 할까요.”
북페어에 많은 사람이 몰리고, 대형서점에서도 희곡 코너를 확대하는 등 불과 3년 전과 비교하면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두 사람 역시 희곡이 연극을 넘어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뿌리로 재발견되는 흐름을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주목하는 것은 트렌드 그 자체가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해 가는 사람들이다.
“연극과 관련이 없더라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남들이 하는 것을 벗어나 자기 취향을 꾸준히 발굴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결국 독립서점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텍스트힙이라는 거대한 물결보다 그 물결을 거슬러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 서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인스크립트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책은 손에 쥘 수 있는 공연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운영자가 서점보다 공연의 문법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스크립트는 처음부터 ‘책만 파는 서점’이 될 수 없었다.
“공연은 그냥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런데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아마 그냥 서점이었다면 못 했을 것 같은데, 희곡서점이라면 누구보다도 희곡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소개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공연이라는 순간의 예술을 책이라는 형태로 건네고 싶었다는 말. 인스크립트가 단순한 서점이 아닌 이유가 이 한 문장 안에 담겨 있다.
함께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인스크립트의 대표 프로그램인 ‘낭독서모임’은 낭독과 독서모임을 결합한 이들만의 이름이다. 독서모임과 연기 워크숍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이 모임에서는 자리에 앉는 순간 누구나 배우가 된다.
“연기를 한다고 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연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어본다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희곡은 소리를 내서 읽어봐야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거든요.”
배우와 작가 등 공연예술인이 안내자로 함께하지만 나머지는 참여자들이 채운다. 어려운 문장이 나오고 대사가 막혀도 옆 사람이 읽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흐름을 붙잡아주는 방식이다.
“희곡은 그냥 멱살을 쥐고 가는 거예요. 어쨌든 읽어야 되니까, 저 사람이 읽고 있으니까.”
낭독서모임의 즐거움은 두 갈래다. 첫째는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옆 사람의 육성을 계속 듣는 것. 둘째는 읽고 난 뒤 곧바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끼리 작은 공연을 했다는 감각으로, 그 여운을 바로 나눌 수 있는 자리. 공연을 보고 나서 감상을 나누는 자리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이 모임은 더 특별해진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이입해 감정을 쏟아내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한다. 희곡이 문학을 넘어 하나의 해방구가 되는 순간이다.
작업자의 책상, 서점으로 옮기다
격월 또는 분기별로 진행되는 ‘이달의 작업자’ 프로젝트는 공연예술 분야 작업자 한 명을 집중 조명하는 기획이다. 박정민 배우와 함께한 단막희곡 공모전과 낭독회, 독립출판 프로젝트도 이 시리즈의 대표 사례다.
“저희의 목적은 결과물이 아니라 작업자를 소개하는 것이었어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평소 어떤 책을 읽는지 보여주면 방문객들도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해서요. 작업자의 책상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기본 콘셉트였어요.”
극작가의 미완성 원고와 연출가의 노트, 배우들의 작업 흔적을 서점 안에 펼쳐두는 일. 이는 책과 공연 사이의 새로운 접점을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책과 사람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인터뷰 말미 권주영 대표는 독립서점이 계속 생겨나는 이유를 ‘나눔’에서 찾았다.
“왜 힘든데도 독립서점을 사람들이 할까 생각해보면 결국 나눔의 마음인 것 같아요.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 싶을 때 만났던 책들을 내 옆에, 내가 사는 동네에도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두 사람에게 인스크립트의 중심에는 언제나 희곡이 있다. 공연을 하고 연기를 하는 것이 먼저이고, 서점은 그 삶의 연장으로 생겨난 공간이다. 처음에는 부업처럼 시작했지만, 지금은 직접 낳은 아이처럼 소중해졌다. 키우고 돌봐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독자분들과 관객분들이 이곳에 와서 연기도 해보고, 희곡과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저희 역시 무대 위의 배우이면서 동시에 독자이기도 하니까요. 그 역할이 계속 왔다 갔다 하면 좋겠어요.”
희곡은 말만으로 이루어진 장르다. 행간이 없고, 지문이 없으면 오직 대사만 남는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인스크립트가 단순한 서점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문장이 살아나는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을 읽고 같은 목소리를 듣는 경험 속에서 독자는 배우가 되고, 낯선 사람은 취향을 나누는 동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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