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23명 기도 다 드리고 온다' 그래요. 다 같이 한날한시에 죽었는데, 다 같이 좋은 데 가 있으라고. 같이 태어나지 않았고, 몸(유해)도 온전치 못하지만, 그곳에서 같이 도우며 살라고. 이 엄마는 2년 동안 기도만 다녔어요. 울산 어디 와불상 있는 절에 매일 가요. 자기는 딸 지켜주지 못한 죄인이라며."
지난 2년 아리셀 참사 유족들의 안부를 묻자, 이순희 아리셀산재피해가족협의회 공동대표는 울산의 한 유족 이야기를 먼저 했다. 2년째 매일 희생자 23명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한 어머니다. 새벽 한두 시경, 잠을 못 이루는 그로부터 전화가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은 가슴 속 이야기를 쏟아내며 한바탕 같이 운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버티고 있다"고 이 대표가 말했다.
이 대표는 "전부 다 우울증에, 약 없인 잠에 들지 못한다"고 유족들 상황을 전했다.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가족의 억울한 죽음에 더해, 최근 판사들의 '농단'과 2년째 사과하지 않은 박순관 아리셀 대표, 당국의 유족 방치가 마음을 더 멍들게 했다고 했다. <프레시안>은 지난 8일 경기 시흥시 정왕동 이순희 대표의 집에서 그를 만나 지난 2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딸 그리다 사망한 유족... 더딘 일상 회복
지난해엔 고 강순복·금복 자매의 어머니 김분옥 씨가 사망했다. 이 대표는 "기나긴 법정 싸움에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버티기 어려워 저세상 딸을 보러 돌아갔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은 조용했다. 아리셀 참사에 대한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적 관심은 유족 대부분이 느낀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현재 한국에 남은 이주민 유족은 여섯 가구다. 희생자 23명 중 17명이 이주민이었고, 16명은 중국, 1명은 라오스 국적이다. 유족의 첫 1년이 농성이 연이어진 길거리 투쟁이었다면, 그다음 1년은 '법정 방청 투쟁'이었다. 한국에 사는 가족협의회의 유족들은 2024년 10월부터 지난 4월까지 총 36차례 열린 1·2심 공판을 거의 빠짐없이 방청했다. "무너지는 가슴을 겨우 붙들어 매고 생계를 뒤로 하고 다들 달려갔다"고 이 대표는 표현했다.
일상 회복은 아직 더디다. 첫째 딸 고 엄정정 씨를 잃은 이 대표는 남은 세 식구가 예전처럼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밥을 먹은 적이 아직은 없다고 했다. 저마다 상처를 회복하고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이 달랐다. 이 대표는 작은 딸을 생각하면 너무 대견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목이 메었다.
"나중에 작은 애 상담선생님한테 듣고 알았어요. 한 번은 시험지에 아무것도 못 쓰고 나왔대. 이름을 딱 쓰고, 아무 생각이 안 나더래. '진짜 언니가 없나' 그 생각만 들더래. 근데 자기는 괜찮다며 '언니가 없는데, 이제 엄마까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 정신 차리게(덜 아프게) 도와주세요'라며 싹싹 빌더래요. '이제 작은 애를 봐서라도, 슬프지만 잘 견뎌 보자'라고 선생님이 나한테 말했어요. 그 후엔 집에선 잘 안 울려 해요."
그러면서 종종 작은 딸은 "엄마, 나는 강한 여자야"라고 말을 건넸다. 상담 선생님과 나눈 대화 중 일부인 것 같았다. 이렇게 유족의 시간은 더디고 시리게 흘러간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최근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 정착한 2002년부터 참사가 터진 2024년까진 거의 하루도 일을 놓은 날이 없던 그였다. 참사 초기 1년은 길거리에서 노숙 농성도 벌이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투쟁에 매달렸다. 그 이후, 돌아서면 숨진 딸이 생각나는 상태로 전처럼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아는 언니가 '니 어딜 가서 무얼 하든 간에 일하라. 가만히 있으면 맨날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잖아'라고 말하며 이 대표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그렇게 지난해 10월부터 인근 지역 수원에서 다시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유족 두 번 죽인 판사들…"판사에게 23명 죽음은 무엇인가"
이 대표는 2심 재판 방청 내내 울화에 찬 가슴을 내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4월 22일 선고 날엔 법원 밖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오열했다. 방청한 유족 모두가 "판사는 자식도 없냐?", "저게 판결이냐?", "우리더러 어떻게 살란 말이냐?"라 소리치며 엉엉 울었다. 2심 재판부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박순관 대표의 형량을 4년으로 대폭 감형한 판결을 한 직후다. 당시 재판장은 신현일 판사, 배석은 강명중·차선영 판사다.
"두 번째 재판인가, 판사 셋 다 재판 끝내고 나갔을 때예요. 분을 참지 못한 유족이 피고인석 박순관한테 '니가 죽여놓고, 지금 아무 죄도 없단 말이 나오냐'고 소리쳤는데, 판사 셋이 다 돌아와서 '방금 소리 지른 사람 누구냐'며 나오라고 엄포를 놔요. '아니 판사 다 나가고 나서 말했다고, 지금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느냐'고 말했어요. 그니까 합의 보지 않았녜. '아니 민사 합의한 게 저 사람 죄를 용서한 게 되냐? 아니다' 그랬죠. 그래도 제 법정에선 하지 말래."
그 후부터 판사 셋은 유족이 먼저 법정을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판사들은 유족을 먼저 퇴장시킨 후에 피고인들을 보냈다. 이 대표는 "유족들이 숨소리 하나 내기 어려운 위압적인 분위기였다"며 "기침 소리만 내도 신현일 판사는 쳐다보며 눈치를 줬다"고 말했다. 또 "재판이 끝나고 내가 뭐라 하려는 척만 해도 경위들에게 나를 막아 세우게 했다"며 "우리가 때리려 했냐, 하물며 욕을 했냐? '왜 사과 안하냐' 물은 것, 그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신 판사는 첫 번째 재판 때 유족 발언도 통제했다. 박순관 대표를 비판하던 한 유족에겐 '억울하다는 사정만 말하고, 법적 판단에 대한 의견은 밝히지 말라'고 지시했다. 박순관 대표를 바라보며 발언한 두 번째 유족에겐 '피고인을 쳐다보며 말하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 재판 땐 '피해자의 진술을 또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듣지 않으려는 취지로 유족 측에 묻기도 했다.
이 대표는 물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 그렇게 하는 거는 되고, 23명이 말도 안 되게 죽은 참사의 유족이 말 한마디 하는 건 안 됩니까? 인간이라면, 내 가족이 이런 참사로 죽고 유가족이 안 될 거란 장담을 할 수 없으니 다시 한번 돌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돈으로 죄를 씻나" 목숨값 깎은 판사의 자의적 감형
2심 재판부가 1심 선고 형량인 징역 15년을 4년으로 감형한 데엔 '합의'에 대한 자의적 판단이 있었다. 박순관 대표 등이 피해자 측에 위자료 등을 지급한 민사적 합의를 감형 사유로 적극 반영해 준 결과였다. 이 대표는 "1심의 15년형에도 우리는 '한 사람 목숨값이 1년도 안 되느냐' 그랬는데, 너무나 억울하다"며 "유족은 박순관이 사과조차 안 했고, 최고형을 원한다고 계속 말했는데, 단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고 거듭 말했다.
"합의라 해봤자, 다 반쪽짜리예요. 중국에 사는 유족은 한국에 오래 있기도 어렵지, 애들도 먹여 살려야지, 회사 말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합의서에 사인하고 급하게 장례 치르고 갔어요. 그 중엔 심장병 앓은 ○○ 아버지도 있었는데, 한 번은 한국에서 쓰러져서 병원 갔더니 148만 원이 나왔어요.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그 후에 또 쓰러졌는데, 병원 안 가고 약으로 버텼어요. '합의 안 한다'고 그렇게 버티다가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합의하고 장례하고 갔어요."
또 다른 조선족 유족도 참사 초기에 합의를 한 후, 이 대표 손을 잡고 "'나는 딸을 내놨다. 딸을 내놨다"고 말하며 울었다. 딸을 잃은 또 다른 중국의 유족도 '속아서 합의했다'고 법원 양형조사관에게 밝혔다. 참사 초기엔 회사는 유족에게 처벌불원서도 동시에 요구했는데, 그는 이때 이게 법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 채 사인을 해줬다고 밝혔다.
지난해 늦게야 민사 합의를 한 다섯 가족은 처벌불원서를 거부해 쓰지도 않았다. 이 대표도 이들 중 하나다. 많은 유족은 민사적 합의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로 왜곡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부 유족은 지난 2월 박순관 대표 등의 양형 조건을 조사한 법원 양형조사관에게 "처벌을 원한다"거나 "최고형으로 처벌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형 조사엔 "처벌을 원한다"는 문구가 삭제되거나, "법대로 해달라"는 문구로 의사가 왜곡돼 반영됐다.
'형체 없는 시신' 유해 수습 외면…유족 고통 방치
이 대표는 정부와 경기도 등 유관 당국에 사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주길 간곡히 당부했다. 아직 유해 수습조차 제대로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셀 공장은 여전히 불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회사가 외부인 출입을 통제해 유족은 들어가지 못한다.
가족협의회가 제한적으로 확인한 결과, 사람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유해는 3구였다. 2구는 양팔, 양다리 모두 없이 머리와 몸통만 수습됐다. 팔이나 다리가 아예 유실된 시신은 3구였다. 팔꿈치나 무릎 아래가 수습되지 않은 시신도 5구였다. 한 유족은 머리와 팔꿈치, 무릎 아래가 없는 상태의 유해를 인계받았다. 이후 늦게 장례를 치를 땐 누군가 머리를 갖다 놓은 상태였으나, 어떤 공무원도 이를 유족에게 알려주지 않아 유족만 애통해했다.
이 대표는 "현재 유족에겐 트라우마 치료가 절실하다"고도 호소했다. 그는 "금방 사고 났을 땐 제정신을 차리기도 어렵고, 시신 수습한다, 진상규명 요구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바빴다"며 "누가 현장에 대어 놓은 '트라우마 센터' 버스를 찾아갈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심리 치료 지원은 참사 초기에 끝났고, 이제야 유족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이어 "2024년 12월 당국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정부·지자체의 아리셀 참사에 대한 모든 관심도 사라졌다"며 "아리셀 참사 유족을 방치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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