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선관위 무능에 훼손된 참정권
6·3 지방선거 본 투표일인 6월 3일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의 참정권 행사가 차질을 빚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채용 비리나 거듭된 선거 관리 부실의 뒤를 잇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선거의 생명인 공정과 신뢰성이 치명타를 입었다.
국민의힘, 서울 포함 7곳 선거 소청 제기
중앙선거관리위에 따르면 6월 3일 오후 6시 20분 기준으로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사태를 인지한 선관위는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대해 투표를 보장하겠다면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의 경우에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이날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던 중 유권자나 아파트 주민 외에도 투표지 부족과 투표 시간 연장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몰려들며 사실상 항의 집회 분위기가 형성된 데 이어 ‘투표함 반출’을 둘러싼 대치 상황까지 빚어지면서 한동안 투표 종료를 선언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혼란이 이어지며 선관위의 투표율 집계도 지연돼 오후 11시 52분이 돼서야 잠정 최종 투표율이 발표됐다.
허철훈 사무총장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중앙선관위원장 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노 위원장은 “투표 참여로 보여주신 지방자치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손상시켰다”며 “나아가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해 선거 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해 선관위원장으로서 참담함과 함께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법무부는 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참여하는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의 요청에 따라 노 전 위원장과 허철훈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등을 출국금지했다. 앞서 경찰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노 전 위원장 등 10여 명을 직무 유기와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선관위의 방만한 운영은 원인 규명 과정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 투표소의 유권자 수 대비 어느 정도 비율로 투표용지를 인쇄해 비치하는지에 대한 통일된 기준조차 없었다.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당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 가운데 서울, 경기, 인천, 울산, 부산, 전남광주 등 6개 지역의 ‘투표지 부족 투표소’에 대해 선거 결과에 영향이 있었는지를 심사로 가려달라고 요구하는 선거 소청을 제기하기로 했다. 국민의힘은 ‘긴급 최고위 결정사항’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에서 “국민의힘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인해 유권자의 참정권이 침해된 투표소 관련 지역의 모든 선거에 대해 선거소청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며 “현재 기준으로 서울, 전남광주, 부산, 인천, 울산, 경기 등을 포함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선거 소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잠실 일대 시위·대학가 시국선언 이어져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잠실 일대 시위와 대학가 시국선언은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한때 4만 명 가까이 모인 이번 집회에서는 2030세대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청년들이 이번 사태에 특히 강하게 반응한 배경에는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높은 민감성이 꼽힌다. 실제 잠실 집회와 시국선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표현은 ‘참정권 침해’였다. 청년들은 결과 자체보다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는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했는지에 주목했다. 이를 두고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청년들의 요구는 선거 결과를 뒤집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선거 관리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밝히고 책임을 묻자는데 있다”며 “절차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대학가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포착됐다. 전국 대학가 성명서를 모은 온라인 사이트 ‘한 표의 기록’에 따르면 212개 대학에서 발표한 성명·시국선언문 391건 가운데 69건은 “이번 사안이 정쟁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인식은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지난 6월 9~11일 전국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7%는 이번 사태를 ‘부실한 선거 관리에 따른 참정권 침해 문제’로 평가했다.
절차적 공정성에 민감한 청년층 특성에 더해 선관위를 둘러싼 각종 논란이 누적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치 주인 없는 기업처럼 9명의 중앙선관위 위원장 및 위원 가운데 1명의 상임위원을 제외한 8명이 비상임인 상태라 조직이 제대로 관리·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더욱이 선관위는 2023년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진 데 이어, 감사원은 2024년 4월 1,200여 건의 채용 규정 위반을 확인하고 27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한 바 있다. 지난해 2월에는 7개 시도선관위의 878건 규정 위반을 추가로 확인하고 32명에 대한 중징계를 요구했다.
한편 개표소 봉쇄 시위의 경우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도, 경찰도 강제 진입은 주저하는 모습이다. 주최자가 없어 경찰 입장에서도 적극적인 조치를 할 법적 근거가 약하고, 올림픽공원은 주거지와 떨어져 있어 소음 등 관련 민원 신고가 상대적으로 적다. 더욱이 개표가 이미 완료된 상황이라 경찰이 선거 사무를 명분으로 현 시위를 제재하기도 어렵다.
현장에서도 대표성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참가자들의 성향과 요구가 제각각이라는 점도 장기화 원인으로 지목된다. 같은 공간에 모여 있지만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정치 성향이 뒤섞여 있어 하나의 의사결정 체계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선거 관리 체계에 대한 신뢰 회복이 이번 사태 수습의 출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책임자를 문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거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청년층의 목소리를 제도 개선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철저히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개표소 봉쇄 시위와 관련해선 불법행위와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엄정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민참정권 침해와 서울 잠실 개표소 인근 집단시위’ 관련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윤 장관은 “최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국민참정권이 침해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라며 “국민참정권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되거나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헌법적 권리”라고 했다. 이어 “신속한 검경합동수사본부 수사를 통해 이번 사태의 전모를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청년대표를 포함하여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숙의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국회 국정조사를 통한 선거관리 제도의 문제 파악과 제도개선안 마련에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는 지방선거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조사하는 국정조사 계획서를 처리했다. 정식 명칭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사태 등 국민참정권 침해 진상규명 및 선거관리 개혁을 위한 국정조사’다.
조사 대상 기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및 각급 선관위로 정리됐다. 증인 및 참고인은 여야 합의로 정해질 예정이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이 간사를 맡는다. 여야는 또 계획서에서 정부와 관련 기관·단체·법인·개인 등이 수사와 재판을 이유로 조사에 응하지 않거나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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