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에 가까운 남녘 시민이 한날한시에 평양에 머물렀던 나날이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2005년 북측은 집단체조 예술공연 '아리랑'의 관람을 외부에 열었고, 남측 정부는 우리 시민의 관람을 승인했다. 몇 달에 걸쳐서 전세기를 이용한 단기 방문 심지어 당일치기도 이어졌다. 그 해에만 7500명쯤의 시민이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 인원은 2008년 한 해에 18만 6000명으로 정점을 찍는다(개성과 금강산 관광 제외. 개성공단 왕래 포함).
평양 시민들은 자유분방한 남녘 시민들을 맞이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따뜻하고 뿌듯한 일만큼이나 소소한 사건이 많았다. 독한 북녘 술을 들이켜다 들려 나간 사람들. 무대의 여성 가수 이마에 달러를 붙인 할머니 때문에 일어난 소동…. 남과 북의 보통 사람들 수십만 명이 몇 해에 걸쳐서 펼친 대규모의 상호이해 학습이었다.
방북 업무는 북에서 인도적 지원을 펼치던 민간단체들이 맡았다. 분단체제에서 교류협력을 하자면 당국이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 생기고 그러면 민간이 궂은 일을 떠맡는다. 북도 사회단체를 만들어서 민간관계의 모양을 갖추었다. 민간이 물밑 대화를 연결하기도 한다. 남북 교류의 시대는 사람들이 오가면 평화가 굳건해진다는 진리를 증명한다.
북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약 5년 동안 거듭되는 자연재해의 피해로 '고난의 행군'을 겪는다. 남측 민간단체들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는 북녘 주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공동육아연구원'과 <한겨레신문>이 대북지원을 위해 함께 모금하는 과정에서 1996년에 만든 시민단체다. '어깨동무'는 처음 생긴 남북협력 민간단체 중의 하나로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필자도 창립 인원의 한 사람으로 아직 일하고 있다. 그 역사에 남북 시민들의 교류와 협력의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어깨동무'는 "민주주의와 평화는 서로 이끌어 간다"는 믿음을 발판으로 삼았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키우고, 평화가 민주주의를 채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과 북의 어린이가 민주시민과 평화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을 시작했다. 어린이들과 함께 북녘 사람들을 '악마화'하거나 북녘 체제를 '신비화'하는 일을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어린이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얼굴 그림을 그려서 북녘 어린이에게 전하고 답장을 나누는 '안녕? 친구야!'도 시작했다.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북녘 어린이들을 살리려고 초기에는 분유, 기저귀, 콩기름 등의 필수품을 전달했다. 1998년 11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우리 어린이들의 그림을 전달하고 북측 어린이의 답장을 받아오는 일을 시작했다. 콩우유를 평양과 지방에서 생산하고 분배했다. 구충제와 약품을 지원하고, 도시와 농촌에 아동병원을 세우고(어깨동무어린이병원, 장교리인민병원, 평양의학대학병원 소아병동) 현대화하는 일(남포시소아병원)을 했다. 학용품공장 설비를 교체하여 필기구를 전국 학생에게 보급하면서 그 필기구를 우리가 수입하는 경제협력도 시도했다.
'어깨동무'와 협력을 이어갔던 북녘 어린이병원 원장은 2013년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어깨동무와 협력한 덕분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매년 1000명 이상 살리는 보람이 있다." 1998년부터 2018년까지 139번에 걸쳐서 1200여 명의 사람이 '어깨동무' 방북에 동행했다. 분단 이후 처음 방북하는 42명의 어린이도 들어 있다. 북녘 어린이의 그림 답장은 1840점에 이른다. 숫자에 담을 수 없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이 남과 북의 사람들에게 남아 있고, 그런 기억은 한반도 평화를 열어가는 소중한 자원이다.
남북 관계가 차가워지면서 남북협력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황도 복잡해지고 있다. '어깨동무'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더욱 힘을 내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성숙도를 높이려는 방향 그리고 북 당국이 주장하는 '적대적 두 국가'라는 방향을 잘 엮어서 '평화적 두 국가' 관계로 전환하는 평화담론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평화담론은 남북이 두 국가이지만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담아야 한다. 과거 담론은 평화통일을 성취하는 '민족공동체'를 중심으로 삼았다. 새로운 담론은 남과 북이 다른 정체(政體)를 유지하더라도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로서 자유롭게 소통하고 공동 이익을 창출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 같다. 관계에 관한 인식 없이 '적대적 두 국가론'이나 '냉담한 두 국가론'을 따라 분단이 흘러가면 지금 다섯 살 어린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남과 북은 서로를 어떻게 여기게 될까?
민족이라는 범주에 세대와 젠더 등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포용하는 내용을 채워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민족 관계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남북이 이웃으로서 삶의 조건의 많은 부분을 공유함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남과 북은 기후위기와 감염병을 공유하는 이웃으로서 국제 세력과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처지도 비슷하다. 남과 북은 '이웃하는 민족'으로서 몇몇 분야에서라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유사입장국(like-minded country)'이 될 가능성을 찾아가야 한다.
평화적 두 국가가 이익을 창출하고 공유하는 방식은 '통일 대박' 같은 투기 욕심이나 임금 착취와 자연 파괴 같은 과거 방식을 단기간에 추진하는 흐름을 피해야 한다. 개인의 무한 탐욕을 조장하는 대신 사적 충분성과 공적 풍요로움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공유자원을 늘리는 사회적 경제, 생태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활용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결국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는 과거의 민족 관계, 경제방식과 삶의 방식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현재에 끌어와서 현재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두 국가론을 인정하더라도 평화와 상생의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남과 북이 각각 변화해야 한다. '어깨동무'와 시민단체는 시민과 '어린이-시민'과 함께 사회적 대화와 공감 소통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창조적 평화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시민단체는 북녘에서 가장 고단한 처지에 있는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일 역시 이어가야 한다. 동시에 갈등과 혐오를 넘어서 평화와 연대의 비전을 한반도와 세계로 확장하면서 북도 그 비전에 합류하도록 초대해야 한다. '어깨동무'가 남북 어린이들의 희망 나누기를 여러 분쟁지역으로 넓히고 있는 '드로잉호프(Drawing Hope)'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분쟁지역 어린이들이 평화를 향한 희망을 그림 그리고 나누는 활동을 펼치는데 작년에는 미국 유엔본부에서 전시회를 마쳤다. 이번에 창립 30주년을 맞아서 남과 북,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등 17개 분쟁국 어린이들의 그림을 국회의원회관과 임진각에서 전시한다. 아울러 그 지역의 청년 평화활동가들이 모여서 국제연대의 길을 찾는다.
앞으로 이런 '다자 평화네트워크'에 북녘 어린이와 청년도 합류하기를 기대한다. 1996년에 남북 어린이는 서로에게 '안녕? 친구야!'라는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인사가 지구촌 전쟁 지역 어린이들이 평화의 희망을 나누는 일로 번지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와 여러 시민단체가 더 단단한 평화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만들려고 한결같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안내>
'어린이어깨동무' 창립 30주년 기념식
: 2026년 6월 25일(목) 오후 6시 30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국제 어린이 평화그림전 '드로잉 호프(Drawing Hope)'
: 국회의원회관 2층 로비(6월 23일-27일). 임진각 한반도 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전시회랑(6월 26일-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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