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료품점 딸이 세상을 뒤집다…노예제 폐지에서 여성 참정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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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료품점 딸이 세상을 뒤집다…노예제 폐지에서 여성 참정권까지

프레시안 2026-06-20 23:08: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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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 딸, 역사의 전면에 서다

영국 에식스주 첼름스퍼드. 1786년, 한 잡화상 집안에서 셋째 딸이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나이트(1756~1814)는 도매 식료품상이었고, 어머니 프리실라 앨런(1753~1829)은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여덟 남매 중 셋째인 이 소녀의 이름은 앤 나이트(Anne Knight, 1786~1862). 훗날 그녀는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불씨를 당긴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출발한 기독교 계열 신앙 공동체다. 성직자도, 화려한 예배의식도 없고, 모든 인간 안에 신의 빛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평화주의와 평등을 실천해왔다. 앤이 태어난 집안은 이런 퀘이커 가문 중에서도 영국 내 유력 퀘이커 집안들과 두루 친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마디로, 19세기 영국 진보운동의 인맥 한복판에 태어난 셈이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편지들에는 결혼을 가리켜 "이 결혼이라는 모순된 것들"이라고 일축한 구절이 남아 있다. 지인들은 그녀를 "독특한 외모의 여인"이라고 기억했는데, 이것이 칭찬인지 아닌지는 당사자만 알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남편 없이도, 아니 어쩌면 남편 없었기 때문에, 더 넓고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변화시킬 수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온 분노, 노예제 폐지 운동

1824년, 앤은 동료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 대륙여행에 나섰다. 이미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의 퀘이커 공동체와 평생 지속될 우정을 맺었다. 그녀의 입장은 명확했다. 노예제는 즉각, 완전히, 그리고 노예주인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상"이라는 단어에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사람을 소유한 죄에 보상금이라니.

1830년대에 접어들어 앤은 첼름스퍼드 여성노예제 반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토머스 클라크슨(1760~1846), 조지프 스터지(1793~1859), 엘리자베스 피즈(1807~1897) 등과 함께 공개 집회를 조직하고 전단을 배포하고 탄원서를 모았다. 1834년에는 유명한 노예제 폐지 연설가 조지 톰슨(1804~1878)에게 프랑스 순회 강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쁘다며 거절했다. 앤의 대응은 간단했다. 그러면 내가 직접 하겠다. 그녀는 혼자 프랑스로 건너가 여러 과학 학술대회와 크고 작은 모임에서 직접 강연에 나섰다. 대타가 주인공이 된 순간이었다.

1840년, 문이 닫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이 열리다

1840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노예제 반대 대회는 앤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었다. 이 대회는 미국과 영국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행사였다. 문제는 미국에서 온 여성대표단이 대회장 내 정식 참가를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방청석에서 커튼 뒤에 앉아야 했다.

앤은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 자리에는 미국의 루크리샤 모트(1793~1880)와 웬들 필립스(1811~1884), 그리고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1805~1879)도 있었다. 세상의 부자유를 끝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회의장에서 여성을 내쫓은 것이다. 앤에게는 이것이 계시였다. 해방을 외치는 운동안에도 또 다른 억압이 자라고 있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바로 이 1840년 대회에서 여성대표들이 배제된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편지에 붙이는 라벨, 세상을 흔들다

1840년대 앤은 본격적인 출판 운동에 나섰다. 그 방식이 독창적이었다. 그녀는 공개서한 형식의 유인물과 소책자를 직접 제작해 배포했고, 아예 형형색색 종이에 소품 글이나 시 구절을 인쇄한 라벨을 만들어 편지봉투 겉에 붙여 보냈다. 그야말로 19세기판 소셜미디어 활동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구호를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녀는 손가락이 아니라 풀과 인쇄기로 글을 퍼뜨렸다.

1847년, 그녀는 영국 최초의 여성 참정권 요구 유인물을 제작했다. 학자들은 이것을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 역사상 최초의 독립선전물로 꼽는다. 이것이 단순한 쪽지가 아니라 역사적 문건이 된 것이다.

한편 그녀는 노동자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에도 공감하며 함께했다. 그러나 이내 환멸을 느꼈다. 차티스트 지도부가 "보통선거권(Universal Suffrage)"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안에 여성을 포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는 말이 남성만을 뜻했다.

1850년 2월, 그녀는 브라이턴 헤럴드지에 편지를 보내 "여성권리 운동이 계급투쟁보다 덜 중요하다"고 주장한 차티스트 논자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차티스트를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으로 꼬집은 것이다.

셰필드에서 피워올린 불씨

1851년, 앤 나이트는 앤 켄트(Anne Kent)와 함께 셰필드 여성 정치협회(Sheffield Female Political Association)를 창설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영국역사상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공식 목표로 내건 단체였다. 그것도 제조업 도시 셰필드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이 유권자를 명시적으로 '남성'으로 규정하며 여성을 배제한 것에 맞서, 이 협회는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 사이 앤은 프랑스를 무대로도 활발히 움직였다. 1846년 파리로 건너간 그녀는 1848년 혁명의 현장에 뛰어들었고, 1849년 파리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잔 드루앙(1805~1894)과 함께 여성의 정치클럽 참가 금지와 여성운동 관련 출판물 배포 금지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국경도, 언어도, 그녀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마지막 정박지, 오베를랭의 마을

1850년대 후반, 앤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 스트라스부르 인근의 작은 마을 발더스바흐(Waldersbach)로 이주했다. 이 마을을 택한 이유가 흥미롭다. 그곳은 18세기 말 장-프레데릭 오베를랭(Jean-Frédéric Oberlin, 1740~1826)이라는 개신교 목사가 살았던 곳이었다. 오베를랭은 가난한 농촌 교구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었고, 앤은 그를 깊이 흠모했다. 그녀는 오베를랭의 손자 집에 세들어 살다가 1862년 11월 4일, 76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생일은 11월 2일, 사망일은 11월 4일이었다. 생일을 이틀 지나 떠났다.

그녀가 남긴 사진 속에서 그녀는 한 손에 팻말을 들고 있다. 팻말에 쓰인 문구는 이렇다: "고통 받는 수백만을 위해 / 신성한 구원자를 위해 / 인류를 해방하라 / 능욕당한 세계에 알려라."

한국에 던지는 질문

앤 나이트가 세상을 떠난 지 16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낯설지 않은 질문들을 던진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국회에 의해 불과 몇 시간 만에 무력화된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동시에 그 복원력을 보여주었다. 앤 나이트가 차티스트 운동 안에서 "보편적 참정권이라면서 왜 여성은 없느냐"고 물었듯이,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 안에서도 비슷한 물음이 제기된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진영 안에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가 실제로 포함되어 있는가.

앤 나이트는 또한 전략적 미디어 활용의 선구자였다. 당시 편지봉투에 붙이는 라벨은 오늘날의 온라인 게시물보다 훨씬 느리고 좁은 매체였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여론을 만들었다. 한국의 진보운동은 소셜미디어라는 훨씬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그 도구가 진정으로 주변부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앤 나이트의 삶은 "나는 너무 작고 힘이 없다"는 자기 위안을 허락하지 않는다. 잡화상 딸이었고, 독신이었고, 남성 중심 운동조직 안에서 번번이 배제당했던 그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작은 전단지 하나하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퀘이커들은 말한다. "모든 사람 안에 신의 빛이 있다"고. 앤 나이트는 그 빛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당대의 온갖 어둠을 향해 겨눴다. 그 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앤 나이트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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