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억 재산가 판사가 남긴 봐주기 신공, "어려운 사건일수록 명판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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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억 재산가 판사가 남긴 봐주기 신공, "어려운 사건일수록 명판결은 없다"

프레시안 2026-06-20 13:01: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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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성고문 은폐와 수서비리 봐주기로 사법부 1위 재산가가 된 사연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이철환(李哲煥, 1938~) 항목의 결론 부분에서 한 문장이 눈에 박혔다.

"이철환보다 고시 서열이 조금 앞선 황선당, 안우만, 박만호 같은 정치판사들은 대법원판사나 대법관이 될 수 있었지만, 이철환, 정상학, 박영무, 이영범, 가재환, 김헌무 등은 대법관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이 치른 대가는 딱 거기까지였다."

대법관이 못 됐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은폐하고, 김근태(1947~2011) 고문 경관 재정신청을 1년 7개월 동안 깔아뭉개고, 수서비리 사건의 핵심을 봐준 사람이 받은 유일한 불이익이 대법관 승진 누락이었다. 영국에서 이 문장을 읽으며, 책임의 무게와 처벌의 무게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1938년 출생,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라는 '특별한 자리'

이철환은 1938년에 태어났다.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으로 가재환(1940~2025), 정상학(1937~), 이영범(1941~)과 동기다. 이 기수에서 무려 여러 명이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철환은 대구고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거쳐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라는, 책이 "법원의 공안부장이자 출세길의 노른자위"로 부르는 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박정희(1917~1979) 정권이 1966년 만든 이 직책은 중요한 시국사건의 판결결과를 사전에 보고받는 위치였다. 안기부 조정관들은 형사지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안기부의 의사를 관철했다. 직접 압력을 넣으면 외압이라 불리지만, 법원내부를 통하면 그 표현이 무색해진다. 이철환은 이 구조 안에서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세계사 속의 동류, '절차의 함정'을 만든 법률기술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의 인물이 떠오른다. 매카시즘 시기 미국의 일부 판사들은 직접 유죄를 선고하지 않으면서도 절차적 장치로 피해자를 무력화시켰다. 재정신청 심리를 무한정 지연시키거나, 형식적 논리로 기각하는 방식이다. 직접적인 폭력보다 절차의 함정이 훨씬 교묘하다. 이철환의 방법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직접 사형을 선고하지도, 직접 고문하지도 않았다. 다만 재정신청을 기각하고, 심리를 지연시켰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가해자를 위한 황당한 논리

이철환의 반헌법 행위의 첫 번째 정점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서울대 휴학생 권인숙이 위장취업 혐의로 연행됐다가 경찰관 문귀동에게 성고문을 당했다. 인천지검은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했고, 권인숙과 변호인단이 재정신청을 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배당된 곳이 하필 이철환의 재판부였다.

1986년 10월 30일, 서울고법 형사3부 재판장 이철환은 문귀동이 "권양 바지단추를 풀고 지퍼를 끌어내렸고 젖가슴을 만진 사실" 등 가혹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그 논리가 황당했다. "직무에 집착하여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됐고, 여론으로 "형벌에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니 기소유예가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변호인단은 절망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더 잔혹한 대목이 있다.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은 위장취업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받았다. 가해자 문귀동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런데 1988년 대법원이 재정신청 결정을 파기환송하면서 결국 문귀동은 징역 5년이 확정됐다. 이철환이 면죄부를 준지 2년 6개월 만에 이루어진 법의 심판이었다.

김근태 고문 경관 재정신청, 1년 7개월 동안 손 놓고 있었다

이철환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노골적인 직무유기는 1987년 김근태 고문 경관 재정신청 사건이다. 법률상 20일 안에 처리해야 하는 재정신청을, 이철환과 후임 정상학은 무려 1년 7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심리를 진행하지 않았다. 변협 인권위가 「심리촉구서」를 여러 차례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이 이철환과 정상학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

김근태는 이 무기력한 사법부를 향해 분노를 토했다.

"저들이 말하는 통치권의 요구와 기대에 적절하게 부응하고 있는지를 따져,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정상학 씨와 이철환 씨처럼 장구하게 되고, 눈에 벗어난 사람은 조 판사 비슷한 처지로 되고 있다."

실제로 김근태 사건에서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후임판사 조열래는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해 사표를 냈다. 반면 이철환은 승승장구했다.

수서비리 사건, "정치인들이 뇌물 받는 게 현실이니 억울한 측면도 있다"

1991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이철환은 제6공화국 최대 권력형 비리사건인 수서지구 특혜분양 비리사건을 맡았다. 정·재계와 청와대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철환 재판부는 청와대 비서관 장병조에게는 징역 6년을 선고하면서도,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등 나머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선고 후 이철환이 한 말이 압권이다. "어려운 사건일수록 명판결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현실적으로 뇌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수서 관련 피고인들이 억울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수억 원의 뇌물을 받은 정치인과 기업인에게 동정을 표하는 판사. 단돈 몇 만 원짜리 절도범도 실형을 받는 나라에서, 이런 발언이 가능했다.

78억 재산, 사법부 1위

1993년 사법부 고위법관 재산공개에서 인천지법원장 이철환은 78억여 원을 신고해 사법부 1위를 기록했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부동산과, 박정희 정권에 5·16장학회로 강탈당한 기업의 주식이 일부였다. 이 공개로 국민적 반감이 일자 그는 제주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됐다. 그러나 1994년 김영삼 정부는 그를 춘천지방법원장으로 복귀시켰고, 1995년에는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영전시켰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1980년대 판사가 성고문 피해자의 재정신청을 가해자 편에서 기각했다면, 즉각 의회 청문회와 사법위원회 조사가 이어졌을 것이다. 재정신청 처리를 1년 7개월 동안 방치한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영국이라면 사법위원회 징계절차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철환은 대법관만 되지 못했다. 그 외에는 어떤 불이익도 없었다. 그는 1999년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2020년까지 활동한 기록이 확인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철환의 그 말을 떠올렸다.

"정치인들이 현실적으로 뇌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억울한 측면도 있다."

권력형 비리에 대한 이런 정서적 면죄부가 60년을 건너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이철환 ⓒ반헌법행위자열전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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