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40만명’.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민의 규모다. 농어촌과 공장, 건설현장, 돌봄 현장 등 우리 사회 곳곳을 떠받치고 있지만 이들을 향한 차별과 인권침해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반복되는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단속 과정의 인권 논란 등은 이주민의 삶이 여전히 사회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법무부는 올해 1월 기준 국내 미등록 외국인 수를 약 4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에서 출생한 미등록 아동·청소년과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까지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미등록 이주민들은 여전히 ‘불법’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간다. 체류 자격의 문제를 개인의 위법 행위로만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사업장 변경 제한, 체류 자격 상실, 생계 문제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미등록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업·농업·건설·돌봄 등 내국인 기피 업종으로 꼽히는 분야는 이주노동자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인력 의존도가 높다. 그러나 노동 현장의 안전과 권리 보장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체류 자격의 취약성을 이용해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억누르거나 종속적 고용관계를 강화하는 사례가 지속 발생하고 있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미등록 이주민들은 노동·복지 안전망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일터에 노출돼 있다. 부상이나 질병이 발생해도 치료를 받기 어렵고 권리 침해를 당하더라도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하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필요하지만 정작 권리는 박탈…이주노동의 현실
우리 사회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여전히 단속과 추방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정부는 2023년부터 미등록 체류자 단속을 강화하며 규모 축소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지금도 매달 약 5000명의 이주민이 체류 자격을 잃고 새롭게 미등록 상태에 놓이고 있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열악한 숙소 환경 등에 노출돼 있지만 적절한 보호를 받기 어렵다. 노동 현장에서 발생한 피해를 호소하거나 권리를 요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기본적인 안전과 인권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뢰로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수행한 ‘이주노동자 사망 원인 분석 및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연구(2024)’에서도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한국인 노동자보다 2.3~3.6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 신고되지 않은 사망 사례나 국내에서 다친 뒤 치료를 위해 귀국했다가 숨진 경우까지 포함할 경우 실제 사망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격차의 원인으로는 이주노동자가 내국인 기피 업종인 고위험·고강도 업무에 집중돼 있는 산업 구조와 언어 장벽이 함께 지목된다. 현장에서는 안전교육과 작업 지시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해 위험 요소를 제때 인지하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금체불 문제도 심각하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노동자 노동인권 침해 사례의 10건 중 8건이 임금체불이었다.
실제로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등에 따르면 최근 전남 고흥군의 한 굴 양식장에서 일한 필리핀 출신 계절근로자 3명은 근로계약 내용과 다른 방식으로 임금을 지급받고 각종 수당도 받지 못한 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굴 까기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는 성과급 체계 아래에서 일했으며 새벽·야간·휴일 근무를 하고도 초과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는 사업주로부터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싶냐”라는 취지의 발언을 듣는 등 체류 자격을 둘러싼 압박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이주노동자를 옥죄는 ‘토끼몰이’식 단속
단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대구 성서공단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베트남 국적의 이주노동자 뚜안씨는 출입국 당국의 단속을 피해 몸을 숨기던 중 추락해 사망했다. 구직비자(D-10)를 가진 그는 생계를 위해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단속을 피해 숨어 있던 공간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주계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체류 자격과 생계가 충돌하는 현실, 그리고 미등록 이주민을 단속 중심으로 관리해 온 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단기취업비자 제도와 사업장 변경 제한, 통제 중심의 출입국 행정,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정책이 이주노동자를 불안정한 체류 환경과 생명의 위협으로 내몰고 있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이에 이주계에서는 정부가 강제 단속 중심 정책을 중단하고이주노동자를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권리 기반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포용’ 언급하지만…현실은 달랐다
지난 3월 법무부는 ‘2030 이민정책 미래전략’을 공개했다. 해당 전략에는 △해외 고급인재 유치 △민생경제 활성화 △안전한 국경 관리 △국민이 공감하는 사회통합 △외국인 인권 보호까지 포괄하는 2030년까지의 이민정책 방향과 기준이 담겼다. 이는 최근 국내 체류 외국인이 빠르게 증가하는 등 이민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에 앞서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외국인력 통합지원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외국인 노동자 지원 방안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이주·노동계가 외국 인력 공급에만 초점을 맞췄다며 정책의 방향성을 비판했다. 이주민을 단순 ‘노동력 공급’으로 사고하는 도구적 관점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또 이 같은 외국인력 정책을 법무부 대신 고용노동부에 일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전국이주인권노동단체는 지난 3월 10일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주민을 필요할 때만 쓰고 버리는 ‘현대판 노예’ 대우를 중단해야 한다”며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강제 단속 중단 및 체류권 부여, 그리고 인권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주민을 단순 노동력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겠다는 방향 전환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정책은 여전히 숙련 노동력 ‘활용’에 초점이 맞춰진 관리·통제 중심의 비자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주민이 처한 차별적 구조와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권과 사회통합이라는 명분만 앞세운 정책이 반복된다면 실질적인 권리 보장보다는 기존 체계를 정당화하는 결과에 그칠 수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주민 관련 지원 정책이 특정 집단에 대한 관리나 활용의 관점이 아닌 기본적인 권리 보장을 전제로 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고용노동부와 법무부, 국무조정실 등은 지난해 12월 ‘외국인력 통합지원 태스크포스(TF)’를 출범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제도권에 편입하는 양성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E-9) 개편과 연계해 한국어 능력과 숙련 수준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합법 체류를 허용하는 방안을 구상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해당 방안을 둘러싸고 부처 간 이견이 이어지면서 정책 논의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해외 국가에서도 미등록 체류자의 합법화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스페인의 경우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하고 범죄 이력이 없는 외국인에게 한시적 취업과 체류를 허용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스폐인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 같은 양성화 방안이 적용될 경우 약 50만명 규모의 외국인이 수혜 대상이 된다.
이주노동자평등연대 정영섭 집행위원장은 본보에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을 강제 단속과 추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서 사회 전반에도 이들을 범죄자나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확산됐다”며 “강제 단속과 추방 중심 정책으로 인해 많은 이주민이 직·간접적으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상당수 미등록 이주민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적 요인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미등록 상태에 놓인 경우가 많다”며 “이들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건강보험 가입이나 각종 공공서비스 이용에 제약을 받고 단속 위험 속에서 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아파도 병원을 찾기 어렵고 권리를 침해당해도 도움을 요청하기 힘든 현실을 바꿔야 한다”며 “미등록 이주민을 제도 밖에 방치하기보다 법과 제도 안으로 편입해 의무를 이행하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권리와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정책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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