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구직자들의 취업 난이도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AI 시대가 도래 하면서 학력, 자격증 등 정량적 요소 보단 경험이나 사고력, 공감 능력 등과 같은 비정량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가 확산되고 있어서다. 정량적 요소는 성적, 합격 유·무 등 명확한 기준이 있는데 반해 비정량적 요소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 보니 구직자 입장에선 혼란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특히 비정량적 요소를 판단하기 위한 근거 자료를 마련하는 과정 자체도 장기적인 노력과 풍부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AI 시대의 스펙 쌓기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AI 기술에 밀려난 학벌·자격증 스펙…기업 인재상도 "경험·소통능력 우선" 변화
최근 세계 각국 글로벌 기업들의 인재 기준이 급변하고 있다. AI 활용이 일상화 되면서 기업에 필요한 역량이나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식·정보 습득 여부, 복잡한 연산 해결, 문서작성 능력 등은 전부 AI로 대체 가능해졌다. 대신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판단해 AI에 작업을 지시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의 소통 능력 등 AI가 접근하지 못하는 부분에서의 역량 발휘는 더욱 중요해졌다. 자연스레 지식·정보 습득 여부나 복잡한 연산 해결의 기준이 됐던 학벌이나 전공, 실무 능력 보유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증 보유 여부 등은 채용 기준에서 멀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 대한상공회의소가 기업 인사담당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기업 채용 트렌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채용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역량을 묻는 질문에 소통·협업 능력(55.4%)을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이어 직무 전문성(54.9%), 도전정신·문제해결능력(25.8%), 창의성·혁신 역량(25.0%), 실행력·주도성(20.8%) 등이 뒤를 이었다. 학벌이나 자격증 보유 여부 등을 언급하는 응답자는 거의 없었다. 단순히 주어진 업무만 수행하는 '지식형 인재'보다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까지 설정하는 '의사결정형 인재'로 채용 기준이 이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변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곳은 글로벌 AI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빅테크들이다. 미국 AI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는 일찌감치 '능력주의 펠로십(고졸 인재 정규직 채용) 실험'에 나섰다. 기존의 대학 교육이 유능한 인재 양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판단에서다. 구글(Google) 역시 채용 과정에서 학력, 자격증 등의 정량적 요소를 배제하고 코딩 테스트와 깃허브(GitHub) 분석을 통해 지원자가 가진 실질적인 업무 역량만을 평가한다. 메타, 어도비 등은 코딩 면접에서 지원자에게 AI 사용을 허용하거나 AI를 활용해 지원서를 작성하는 구직자를 우대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과거의 채용 기준 파괴 시도에 동참하고 있다. '억대 성과급'으로 청년 취업준비생들의 '취업 1순위' 기업으로 떠오른 SK하이닉스가 대표적이다. SK하이닉스는 이달 17일부터 신입사원 수시채용을 실시 중인데 기존 채용 공고에 필수 조건으로 명시해 왔던 '4년제 학사 학위 이상 지원 가능' 등의 학력 자격 요건을 삭제했다. 정형화된 학위 스펙이 미래 반도체 주도권을 보장과 무관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이는 그동안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강조해 온 AI시대 인재상과도 맞닿아 있다. 앞서 최 회장은 AI시대 인재 역량으로 스스로 질문하는 '생각 근육', 변화에 유연한 '적응 근육', 협업을 이끄는 '공감 근육' 등을 제시한 바 있다.
"뚜렷한 기준 없는 스펙에 취업 난이도 상승 불가피…교육 패러다임 전면 수정 시급"
그런데 오랜 기간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여겨졌던 '학벌 스펙'의 폐지가 현실화된 데 대한 여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벌 차별이 사라졌다"는 반가움 섞인 목소리와 "앞으로 취업 준비 난이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과 사회 경험이 풍부한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정량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 교육 체계의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아 주목된다.
서울 소재 한 대기업 임원으로 재직 중인 박수영 씨(54·남·가명)는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면 알겠지만 정답이 정해진 문제의 답을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며 "취직 역시 마찬가지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일정 기준 이상의 스펙을 요구한다면 맞추면 그만이지만 생각하는 능력, 경험 등과 같이 뚜렷한 기준이 없는 요소들은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할 지부터 막막해 보인다"며 "기업 입장에서도 필요한 역량에 대한 근거 자료를 요구할 것인데 그게 1~2년 준비한다고 될 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박 씨는 "앞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정신적·신체적 부담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고 강조했다.
서울의 한 대형학원에 재직 중인 김지유 씨(36·여·가명)는 "기업이 아무리 AI 맞춤형 인재를 고용하려고 해도 우리나라 교육 체계부터 바뀌지 않는 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며 "어렸을 때부터 십수년 넘게 등급이나 점수, 합격과 불합격으로 평가받던 청년들에게 취업 과정에서 확 바뀐 평가 기준을 제시한들 그들이 바뀌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이어 "결국엔 기업들이 요구하는 비정량적 요소들도 자격증과 같이 미리 준비해야 하는 스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며 "고교 시절, 또는 대학 시절에 일부러 경험을 만드는 식인데 아마 그렇게 되면 당사자들이 느끼는 부담은 지금보다 더욱 커질 것이다"고 설명했다.
다수의 전문가들도 청년세대 입장에서 학벌, 자격증 등 정량적 요소 배제를 단순히 반가워만 할 사안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과 같은 교육 환경에선 기존에 비해 취업 난이도가 더욱 높게 느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벌이나 자격증 같은 정량적 스펙의 붕괴는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기회처럼 보이지만 구직자들에게는 훨씬 더 모호하고 가혹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며 "경험과 사고력이라는 비정량적 요소는 결국 개인의 환경이나 자라온 배경, 경제적 여유에 따라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확실한 정답이 없는 스펙을 증명하기 위해 청년들이 각자 알아서 서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취업 시장의 불확실성과 청년들의 심리적 고립감은 과거보다 훨씬 깊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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