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오혁진 기자 = 거실 한가운데 5만원권 현금다발이 산처럼 쌓여 있다. 수사기관은 현금 규모가 500억원이 넘는다고 판단했다. 압수된 현금 주인은 필리핀 등에서 2조원대 규모의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를 받는 한창훈이다. 수사기관은 필리핀에서 잡힌 한창훈을 송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그는 베네수엘라로 국적을 변경하고 필리핀에 수감됐다.
필리핀 국가수사국(NBI)은 지난해 2월25일 한국 검찰과의 공조를 통해 한창훈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한창훈은 2014년 12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온라인 불법 도박 사이트 23개를 운영하며 약 2조원 규모의 도박 자금을 송금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마린시티
500억 탑
검찰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수익 약 2000억원이 조직적인 자금세탁을 통해 은닉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범죄수익 가운데 상당한 자금이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대부업체 등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부산지방검찰청은 지난 2024년 대규모 자금 세탁 조직을 적발하면서 한창훈 조직의 실체 일부를 밝혔다. 도박 사이트 조직원은 검거됐지만, 정작 총책인 한창훈은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검찰은 5년 넘게 그를 추적해 왔다. 그는 자금 세탁 용도로 타이어 회사를 약 140억원에 인수하는 등 범죄수익 2000억원을 은닉해 국민체육진흥법 및 범죄수익은닉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다.
앞서 부산지검은 같은 해 12월 초 한창훈의 연인으로 알려진 인플루언서인 김모씨의 필리핀 입국 정보를 제공했다. 검찰에서 파견된 수사관이 김씨의 숙소를 파악하고, 세부에서 한창훈을 검거했다. 김씨와 한창훈이 함께 데이트하는 장면 등을 국가정보원이 포착하기도 했다. 5년6개월 간 도피한 끝에 잡힌 것이다.
NBI 등은 한창훈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총격 사건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창훈이 세부 경찰을 매수하면서 NBI와 국정원 등에 실탄을 발사하도록 한 것이다. NBI는 교섭 끝에 가까스로 한창훈을 필리핀 이민국 비쿠탄 구금센터로 이송했다.
제보에 따르면, BDC에 수감됐던 한창훈은 보석금으로 한화 약 150억원을 내고 풀려났다. 특히 필리핀 정부가 제공한 은신처에 숨어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한창훈은 2019년 5월 필리핀으로 도피한 후 2020년 2월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했다. 내부 조직원의 신고로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해당 조직원은 지난 2021년 인천지방검찰청에 한창훈을 고소했다. 조직원 A씨는 “수사기관에 도박 사이트 이용객 정보를 탈취, 제공하다가 한창훈에게 걸리면서 폭행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A씨는 한창훈을 폭행, 협박, 도박장 개장죄,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를 결심했다고 한다.
국내 최대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검찰 확인 범죄수익만 2000억원
<일요시사>가 확보한 A씨의 진술 조서에는 그가 2021년 2월부터 8월까지 한창훈 조직에 소속돼 다수의 도박 사이트 운영 업무를 수행했다고 적혀 있다.
A씨는 법정에서 “입·출금 내역 자료와 관리자 페이지를 확인하며 회원들의 입금액과 베팅 금액, 수익금 지급 여부 등을 관리했다”며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관리한 사이트 수가 20개가 넘었다고 증언했다.
A씨는 “한창훈의 조직은 최소 23개의 도박 사이트를 운영했다. 사이트마다 규모 차이는 있었지만 개인 사이트 기준 회원 수는 약 1000명 수준, 일 베팅 금액은 수억원대, 월 수익금은 수십억원 규모였다”며 “일부 사이트는 최소 베팅 금액이 3만원 수준이었고, 최대 베팅 금액은 수백만원에 달했다”고 했다.
A씨는 2021년 2월부터 8월까지 경기도 소재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해당 사무실에는 조직원 수십명이 근무했다. 입금 확인과 충전 업무, 회원 응대, 관리자 페이지 관리 등의 업무가 분담돼있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조직이 사무실을 이전하는 과정도 계획적이다. 그는 “수사기관 단속을 우려해 사무실을 다른 장소로 옮긴 적이 있다”며 “이전 과정에서 기존 자료들이 옮겨졌고, 이후에도 도박 사이트 운영은 계속됐다”고 말했다.
A씨는 법정에서 자신이 운영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검찰이 “당시 운영자가 누구였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관리자 역할을 수행했을 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만 조직 내에는 운영 책임자와 관리자, 충전 및 정산 담당자 등이 별도로 존재했으며, 여러 명이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였다고 반박했다.
한 사장과
부산 식구들
또 검찰이 제시한 증거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서도 한창훈을 비롯해 일부 조직원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함께 근무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창훈이 검거되긴 했으나 국내 송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한 한창훈은 단순한 한국인 도피 사범과 달리 국적 문제가 얽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범죄인 인도는 한국 검찰이 요청한다고 자동으로 이뤄지는 절차가 아니다.
필리핀 법원의 심사를 거치고 한창훈이 각종 이의신청과 법적 대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법조계에서도 한창훈이 베네수엘라 국적을 근거로 송환 반대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일각에서는 과거 필리핀에서 송환된 ‘마약왕’ 박왕열 사례처럼 송환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실제 필리핀은 범죄인 인도 외에도 이민법 위반이나 체류 자격 문제를 근거로 외국인을 강제 추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창훈은 베네수엘라 국적 취득 이력이 있는 만큼 일반적인 한국인 도피 사범보다 송환 절차가 복잡할 수 있다.
법무부 국제형사과에 몸담았던 한 검찰 관계자는 “NBI 체포와 비쿠탄 수감까지 이뤄진 만큼 법조계에서는 송환이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송환되느냐가 핵심”이라고 봤다.
수사 초기 검찰이 확보한 사진에는 5만원권 현금 다발 수십만장이 해운대 마린시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거실에 쌓여 있었다.
동업자
장씨는?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김보성 전 부산지검 강력범죄수사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현금 다발을 가로·세로·높이로 계산해 봤더니 500억원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였다”고 밝혔다. 사건 주임검사였던 이홍석 검사도 “처음 봤을 때는 조작된 사진인 줄 알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결과 이 돈은 한창훈이 필리핀 서버를 이용한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과정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 일부였다. 이용자들이 입금한 돈은 수백개 대포통장으로 분산된 뒤 전국 ATM을 돌며 현금을 인출하는 방식으로 세탁됐다. 인출책들은 매일 수억원씩 현금을 뽑아 자금 세탁 조직에 전달했고, 이 돈은 다시 부동산과 슈퍼카, 미술품, 법인 인수 자금 등으로 형태를 바꾸며 세탁됐다.
한창훈 조직은 약 470억원 상당의 고급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가티 시론 1대와 페라리 2대 등 약 50억원 상당의 슈퍼카를 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압수 당시 발견된 부가티 시론은 시가 약 45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수사 과정에서는 범죄에 가족들까지 동원된 정황도 드러났다. 운영 총책 한창훈의 가족과 자금 세탁 조직원들의 배우자, 장모, 부모 등이 범죄수익 은닉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창훈 조직은 수사망을 피하고자 치밀하게 움직였다. 검찰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수십억원대 슈퍼카를 지인 명의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빼돌렸다. 또 핵심 조직원이 소환되자 해외로 도피시키며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사기관 내부 상황까지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 검사는 “조직원들에게 검사 인사가 있는 2월까지만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지시한 정황이 있었다”며 “대형 로펌 여러 곳을 선임해 수사기관 내부 사정을 파악하려 했다”고 밝혔다.
내부 폭로자 등장, 겁먹고 국적 변경
베네수엘라 국적 취득…송환 불투명
조직의 계산은 빗나갔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인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수사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핵심 조직원들이 잇따라 검거됐다. 검찰은 1년 동안 450개가 넘는 계좌를 분석하며 범죄수익 흐름을 추적했고 특정된 범죄수익 550억원 가운데 약 97%를 압류·추징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한창훈 사건의 자금 세탁을 도운 동업자 장모씨도 재조명되고 있다. 장씨는 인터넷 방송업계에 거액의 후원금(별풍선)을 지출한 인물로 유명하다. 한창훈의 불법자금이 별풍선으로 BJ에게 입금되고, 이를 다시 장씨가 현금으로 돌려받는 형태다.
제보자에 따르면 과거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예비회장’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장씨가 한창훈의 도박 사이트 지분에 참여하는 등 사업적으로 연관돼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장씨는 온라인 광고를 통해 도박 사이트를 광고하며 이용자를 끌어들인 것으로 파악됐다.
장씨는 2020년 말부터 2021년 초까지 약 17억원 상당의 별풍선을 후원했다. 당시 일부 BJ들은 장씨의 후원에 힘입어 별풍선 순위 상위권을 기록하기도 했다.
제보자들은 장씨의 자금 출처와 관련해 의문을 제기한다. 검찰은 한창훈이 과거 검거됐던 세부 지역에 체류 중이라고 의심 중이다. 한창훈 검거 이후 장씨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장씨는 지난 2021년 아프리카TV 게시판에 “이제는 제가 떠나도 될 듯해 저는 이만 일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라며 자취를 감췄다. 한창훈이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한 지 1년여 만이다. 당시 일부 유명 BJ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연예계
돈세탁?
금융당국은 상품권을 유튜브 후원이나 인터넷 방송 플랫폼의 별풍선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언급하며 대규모 거래 가능성을 의심한다. 이 밖에 한창훈의 범죄수익금이 모 엔터테인먼트 회장 C씨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C 회장의 지인이자, 부산 조직폭력배 관계자인 여모씨가 한창훈의 자금을 1차로 받아 C 회장에게 투자 형태로 흘렀다는 의혹이 골자다.
차 회장이 비서를 통해 여씨 측 자금을 수령했다는 취지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드러났다. 수사기관은 C 회장과 여씨 사이에 있었던 금전거래와 자금 세탁 의혹에 대해 수사할 방침이다. 여씨는 강남에 위치한 B 시계 상점 대표자이자 10여개 이상 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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