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 "Fuck AI"를 외친 무대 뒤엔 AI 광고판이 걸려 있어
지난 5월 제79회 칸 영화제 개막 첫날 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20주년 복원판 상영이 끝나자 거장은 마이크를 잡고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Fuck AI(엿 먹어라 AI)."
객석은 긴 박수로 화답했고,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는 이 욕설을 즉석에서 올해 칸의 첫 정치 선언이라고 격상시켰다.
한마디로 거룩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델 토로가 "엿 먹어라 AI"를 외친 그 무대를, 정작 AI 기업이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칸의 헤드라인 기술 스폰서는 메타였고, 또 다른 주요 후원사는 중국 콰이쇼우 산하의 영상 생성 AI 기업 '클링 AI'(Kling AI)였다.
인간 영화의 존엄을 외친 입과, 그 입에 마이크를 쥐여 준 손이 서로 달랐다. 필자는 이번 칼럼에서 그러한 모순에 관한 지적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모순은 칸이라는 먼 무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해 칸의 공식 입장은 분명했다. 프레모와 집행위원장 이리스 크노블로흐는 생성형 AI가 주도한 영화를 경쟁부문에서 배제한다고 밝혔다. 영화는 데이터의 짜깁기가 아니라 한 개인의 비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같은 영화제의 다른 풍경이다.
본선에서 배제된 AI 도구는 필름 마켓에서 버젓이 거래됐고, 95분짜리 완전 AI 생성 장편 '헬 그라인드'(Hell Grind)는 칸이 상영한 적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마켓 주변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 'WAIFF'(World AI Film Festival)라는 병렬 AI 영화제까지 열렸다. AI 영화는 이미 자기만의 축제와 권위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쪽에서 거장이 AI를 저주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AI 기업이 영화제 운영비를 대고, 또 다른 곳에서는 AI 영화가 자기들끼리 시상을 한다. 세 장면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현실이다. AI는 더 이상 영화 바깥의 위협이 아니다. 이미 산업 안으로 들어와 비판받으면서 동시에 후원하고, 배제되면서 동시에 거래되는 존재가 됐다.
◇ 세 거장, 세 갈래 길
이 분열은 거장의 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델 토로의 거부는 그저 반발만이 아니다. 그는 신작 '프랑켄슈타인'을 만들며 실제 세트를 짓고 의상에 손으로 자수를 놓았다. 손으로 만든 것의 흔적이 영화의 본질이라는 신념에서 나온 거부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정반대 자리에 섰다. 그는 올해 칸에 존 레넌의 마지막 인터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들고 왔는데, 시각 자료가 없는 철학적 대목을 메우기 위해 영상의 약 10%를 메타의 AI로 생성했다. 추상적 시퀀스는 혹평받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내부고발자라 부르며 AI 사용을 먼저 공개했다.
10년 전이라면 막대한 비용으로 시각효과 업체를 고용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과 진짜 문제는 AI 사용이 아니라 다들 그 사실을 숨기는 데 있다는 게 그의 논리다. AI가 정당화되는 기준은 오직 하나, 꼭 필요한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이다.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칸을 찾은 그는 AI를 또 하나의 특수효과일 뿐이라며, 적절한 규제 장치만 있다면 고인이 된 배우의 디지털 부활까지 가능하다고 시사했다. 세 사람은 갈라지지만 셋 모두 진심이고 누구도 위선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 충돌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세 개의 답이다.
자연스레 묻고 싶어진다. 누가 옳은가. 필자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본다. 델 토로의 "Fuck AI"는 통쾌하지만, 그 무대 뒤 메타 배너는 선언의 순수성을 복잡하게 만든다. 영화제가 AI 기업의 돈으로 운영되며 AI를 규탄할 때, 그 규탄은 진심이면서 동시에 면죄부 의식이 된다. 욕설로 양심을 지키고 수표로 살림을 꾸린 셈이다.
이를 개인의 위선이라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산업 전체가 빠진 구조적 모순이다. 소더버그의 도구론에도 빈틈이 있다. 그가 AI를 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돈이 떨어져서였다. AI는 종종 예술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선택이며, 그 비용은 고용되지 못한 시각효과 기술자가 치른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AI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이것이다. AI를 쓰지 않을 자유를 누가 가질 수 있는가. 델 토로는 거부할 수 있다. 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거부는 미학적 신념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특권이다. 그러나 첫 단편을 5천만 원으로 찍어야 하는 청년 감독에게 그 선언은 사치이거나 불가능한 선택지다. 이 비대칭이야말로 AI 시대 영화의 진짜 쟁점이고, 그것은 칸이 아니라 한국에서 더 극적으로 펼쳐진다.
◇ 한국, AI 영화는 이미 극장에 걸렸다
지난달 21일 '아이엠 포포'(I'm Popo)가 개봉했다. 배급사가 국내 최초의 생성형 AI 장편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웹툰 작가 출신 김일동 감독이 프롬프트를 돌려 화면을 채웠고, 배우 심지원이 그 AI 영상 위에 연기를 입혔다. 64분 분량의 이 영화는 빅데이터로 예측한 '미래의 범죄자'를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로봇 경찰의 이야기다.
AI로 만든 영화가 AI의 통계적 폭력을 고발한다. 평가는 냉정했다. 얼굴의 불안정성과 짧은 샷, 정서적 깊이의 부재 같은 현재 기술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는 산발적 실험이 아니다. 지난해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은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KT는 생성형 AI 옴니버스 영화를 CGV에서 단독 개봉했다.
한국이 칸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정부가 AI 영화를 적극적으로 민다는 데 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올해 AI 기반 장·단편 38편을 선정 지원하는 사업을 신설했고, 중예산 영화 예산을 200억 원으로 두 배 늘렸으며 기획개발 예산도 80% 증액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별도로 역대 최대인 198억 원을 AI 콘텐츠 제작에 투입한다. 콘진원 집계로 지난해 상반기 콘텐츠 산업의 생성형 AI 활용률은 20%를 넘어섰고, 방송·영상 분야는 1년 새 4%에서 30.8%로 급증했다.
배경에는 냉혹한 경제 논리가 있다. 박스오피스는 코로나 이후 회복하지 못했고 관객은 OTT로 빠져나갔다. 이 위기 속에서 AI는 제작비를 몇분의 일로 줄이는 마법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칸의 "Fuck AI"와 한국의 보조금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 된다. 델 토로가 거부할 수 있는 건 거부해도 영화를 만들 자본이 있기 때문이고, 한국의 청년 감독이 받아들이는 건 그것 말고는 장편을 만들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고귀한 거부와 절박한 수용은 같은 불평등의 두 표현이다.
◇ 진짜 문지기는 제도, 진짜 비용은 노동
한국 AI 영화의 진짜 장벽은 기술도 자본도 아니다. 제도다. AI는 '제작'의 문턱을 낮췄지만, 무엇이 보일지를 결정하는 '배급'은 여전히 전통적 제작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많은 플랫폼이 AI 콘텐츠에 대한 명확한 정책이 없다.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잇따라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있지만 이 영역은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제작 능력은 가속하는데 제도적 신뢰는 따라가지 못한다.
밑바닥에는 좀처럼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는 진실이 있다. 바로 일자리다. 여러 산업 보고서는 향후 몇 년 안에 영화·TV·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수만 개의 일자리가 AI에 대체될 것으로 전망한다. AI가 가장 먼저 지우는 것은 스타 배우가 아니라 영화를 실제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들, 곧 3D 모델러와 배경 아티스트, 시각효과 기술자다.
2023년 할리우드 작가·배우조합 파업의 핵심 쟁점도 AI였다. AI를 둘러싼 미학 논쟁은 언제나 노동 논쟁이다. 우리가 영화의 영혼을 말할 때 그 영혼은 추상이 아니라 수천 명의 구체적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K-콘텐츠 신화'의 토대 역시 다르지 않다.
여기서 경계할 것은 두 가지 함정이다. 하나는 'AI는 예술의 죽음'이라는 낭만적 거부다. 고결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가진 자의 사치로 비칠 공산이 크다.
다른 하나는 'AI는 창작의 민주화'라는 기술 낙관에 대한 시선이다. 진보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노동의 소멸을 해방으로 포장한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약속 뒤에서 실제로 만들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그 영화가 누구에게 보일지는 여전히 옛 권력이 결정한다. '제작의 민주화'가 곧 '배급의 민주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AI를 막자는 것도, 환영하자는 것도 아니다. 모순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두 이미 그 모순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모순을 의식하고, 욕설과 수표 사이에서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며, 그 자리에서 규칙을 세우는 일이다.
학습 데이터에 빨려 들어간 원작자에게 무엇을 돌려줄지, 화면에서 지워지는 스태프의 고용을 어떻게 지킬지, 표준계약과 배급 심사에 AI를 어떻게 명시할지. 칸은 욕설을 외치면서도 AI 기업의 돈을 받았고, 한국은 활용률 20%를 돌파하는 동안, 이 규칙들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인간 영화의 존엄을 외치는 일은 쉽다. 정작 어려운 것은 그 무대 뒤 광고판을 직시하고, 광고비와 존엄 사이에서 어떤 규칙을 세울지 묻는 일이다. AI가 이미 영화 깊숙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그 모순 안에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모순은 칸에만 있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 극장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러한 영화들이 상영 중이기 때문이다.
이은준 미디어아티스트·인공지능 영상 전문가
▲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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