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신규 원전 부지선정평가위원회를 열어 경북 영덕군을 신규 대형 핵발전소 2기 건설 후보지로, 부산 기장군을 소형모듈원전(SMR) 건설 후보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상업용 핵발전소인 고리1호기가 영구 정지한 지 9년이 되는 날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리1호기 영구 정지에서 에너지 전환의 가능성을 읽었던 그 자리에서, 한국 사회는 다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울3·4호기(구 신고리 5·6호기) 건설 이후 새로운 핵발전소가 추가로 건설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른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탈핵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깊은 실망감을 주었고 공론화 과정과 결과는 탈핵운동 진영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역시 "지금 짓고 있는 것은 마저 짓고 이후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소극적인 접근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고리1호기가 영구 정지되고 영덕과 삼척의 신규핵발전소 추진 계획이 백지화된 이후에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새로운 핵발전소 부지를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고리1호기 영구 정지를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성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고리1호기 영구 정지는 박근혜 정부 시절 결정된 사안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온 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의 끈질긴 요구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물론 노후 핵발전소는 계속 가동되고 있었고, 사용후핵연료 처분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다. '핵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새로운 핵발전소를 짓는 시대는 끝났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그런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했다. 신규 핵발전소 건설,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 SMR 개발과 수출까지 핵진흥 정책은 거침없이 추진됐다. 국민의 기본권마저 짓밟으며 계엄을 시도했던 정부에게 시민의 안전이나 에너지 정의가 중요한 가치였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그 이후다. 내란의 밤을 지나 시민들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고 부르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신규 원전과 SMR 추진 기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는 AI와 반도체 산업 육성, 데이터센터 확대, 전력 수요 증가 등을 이유로 신규 핵발전소와 SMR 추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전력 소비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에 가깝다. AI와 반도체 산업의 성장만을 전제로 막대한 전력 수요를 예측하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신규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접근은 과거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분산형 에너지 체계 구축, 에너지 효율 향상과 수요 관리 같은 대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결국 가장 익숙한 해법인 핵발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의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에너지원이 민주주의와 정의, 지역 간 불평등, 미래세대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지 함께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전력계획의 주무 부처인 기후에너지환경부의 김성환 장관이 자주 쓰는 표현이 바로 '녹색문명'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탈탄소 녹색문명을 강조한다. 더 많은 전력 수요를 전제로 하고,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고 지역 발전과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특정 지역에 위험을 집중시키는 사회가 과연 녹색문명사회일 수 있을까. 핵발전 확대는 성장 중심의 낡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 아니다. 더욱이 최근 중동의 전쟁 위기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핵발전 확대가 에너지 안보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핵발전의 원료인 우라늄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에너지 안보를 이야기하면서 연료를 100% 해외에 의존하는 발전원을 확대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오히려 태양광과 풍력처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고 분산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가 장기적으로 에너지 자립과 안보를 높이는 방향에 가깝다. 결국 핵발전 확대 정책은 기후위기 대응에도, 에너지 안보에도, 녹색문명으로의 전환에도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영덕과 기장 두 지역은 모두 오랫동안 핵발전소와 관련된 사회적 갈등을 경험해 온 곳이다. 특히 영덕은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핵발전소 계획을 철회시킨 경험을 가진 지역이기도 하다. 2015년 영덕에서는 핵발전소 유치 찬반을 묻는 민간 주도의 주민투표가 진행됐고, 전체 유권자의 32.5%에 해당하는 1만1209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91.7%가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했다. 이후 천지원전 계획은 백지화됐고, 2021년 산업통상자원부는 예정구역 지정까지 공식 해제했다. 당시 영덕군의 원전 유치 과정은 주민 의견 수렴 부족과 절차적 정당성 논란으로도 큰 사회적 갈등을 낳았다.
기장 역시 마찬가지다. 고리1호기가 영구 정지됐지만 기장은 인근 울주의 새울핵발전소를 포함해 여전히 국내 최대 규모의 핵발전소 밀집 지역이다. 수십 년 동안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온 지역에 다시 SMR을 배치하겠다는 계획은 기존의 위험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정이다. SMR의 안전성과 경제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상용화 기술에 대해서도 여전히 많은 불신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SMR 역시 가동되는 순간 핵폐기물을 발생시킨다. 결국 지역의 핵 의존 구조와 핵식민지화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핵발전소는 단순한 발전설비가 아니다. 부지 선정에서부터 건설, 수십 년에 걸친 운영, 그리고 사용후핵연료와 핵폐기물 관리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미래와 공동체의 삶, 안전과 환경, 나아가 다음 세대의 문제까지 함께 결정하는 문제다. 핵발전 정책이 반복해서 사회적 갈등을 낳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충분한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이 정책이 추진된다면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깊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이번 부지 선정이 곧 핵발전소 건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환경영향평가와 예정구역 지정·고시, 각종 인허가 절차 등 넘어야 할 과정이 많이 남아 있다. 핵발전소는 다른 어떤 시설보다 주민들의 삶에 장기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시설이기 때문에 사업자의 판단이나 정부의 계획만으로 추진돼서는 안된다.
실제로 영덕과 삼척은 주민들의 힘으로 신규 핵발전소 계획을 백지화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리1호기 역시 시민사회의 오랜 문제제기와 지역 주민들의 요구가 없었다면 영구 정지에 이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핵발전 정책은 언제나 정부와 사업자가 결정하고 시민들이 뒤늦게 저항하는 방식으로 추진됐지만 역사는 시민들이 반드시 패배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고리1호기 영구 정지 9년째를 맞은 오늘, 핵발전으로 회귀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고리1호기의 영구 정지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는 낡은 핵발전소 한 기를 멈췄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 더 크다. 핵발전소를 더 지을 것인지의 문제는 결국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의 문제와 연결된다. 더 많은 전력 소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공급을 늘리는 사회, 위험은 지역에 떠넘기고 성장의 이익만 이야기하는 사회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인지 핵발전소 지역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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