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중국 상품교역 적자 15%↑…EU 27개 회원국 전원이 적자
"유럽 산업, 존재론적 위기" 공감대…대응 방안 놓고는 온도차
(브뤼셀=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우리와 중국과의 무역 관계는 '재설정'(reset)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립이 아니라 다시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 상태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유럽연합(EU) 통상·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EU와 중국의 무역 관계를 이렇게 진단하며 EU 차원의 대응 방안이 필요한 시점임을 강조했다.
EU 통상 정책의 책임자인 셰프초비치 집행위원의 이런 발언에는 중국과의 교역에서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고 있는 EU의 답답한 현실이 반영돼 있다.
2025년 유럽이 중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본 적자는 전년에 비해 15% 증가한 3천600억 유로(약 634조원)에 달했다. 인구 4억5천만명의 유럽이 인구 14억 5천만명의 중국과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하루에 10억 유로(1조7천억원)꼴로 적자가 쌓인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관세 장벽을 높인 여파로 갈 곳을 잃은 중국 상품이 유럽 시장으로 물밀듯 들어오면서 EU의 적자 규모를 키웠다.
유럽 전문 매체 유로뉴스에 따르면, 특히 작년의 경우 EU 회원 27개국 전원이 중국을 상대로 상품 무역 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사상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EU 내에서는 중국이 국가 보조금을 바탕으로 저가 상품을 과잉 생산해 시장에 푸는 방식으로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산업이 존재론적인 위기에 내몰리는 한편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의 수출품이 단순한 저가의 공산품을 넘어 전기차부터 로봇, 배터리, 태양광에 이르기까지 첨단 제조업과 친환경 산업으로 확장되면서 유럽 기업들의 성장 가능성까지 차단한다는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EU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도 값싼 중국산 제품의 범람과 핵심 원자재의 높은 대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산업가속화법'(IAA), '메이드 인 유럽' 전략,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를 겨냥한 '사이버보안법'을 추진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중국과의 불공정하고, 불균형한 현 무역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EU 차원의 좀 더 강력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연일 커지면서 18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막한 EU 정상회의에서는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다만 문제의 심각성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이를 풀기 위한 대응 방안을 놓고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회원국별로 온도차를 보이고 있어 일사불란한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다.
프랑스를 필두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벨기에, 스웨덴, 덴마크 등의 국가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EU 차원의 대응 강화를 촉구하고 있다.
반면, 독일처럼 중국 시장으로의 수출 비중이 큰 나라나 스페인같이 중국의 투자가 많이 이뤄지는 국가들은 중국의 보복을 우려하며 좀 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당사국인 중국이 EU가 중국 상품을 상대로 보호 장벽을 높일 경우 보복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도 EU로서는 부담스럽다.
역내 산업 보호를 위해 강경 대응을 하자니 첨단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희토류를 꽉 쥐고 있는 중국이 수출 통제 카드로 맞불을 놓을 경우 EU 산업계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EU가 불공정 관행으로 지목하는 국가보조금 등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은 한편으로는 자국 기업들의 수출 호조는 혁신과 규모의 경제 덕분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럽 기업들의 혁신 부재와 허약한 경쟁력을 넌지시 꼬집는 것으로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불리한 조건을 성토하는 구성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수용한 유럽은 중국과의 교역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며 이처럼 이중고에 놓여 있다.
하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회원국 간 조율과 의견 통일이 필요한 의사 결정 구조 탓에 당분간은 다른 사안들처럼 말잔치가 이어질 뿐, 난관을 타개할 뾰족한 돌파구를 찾아 이를 행동에 옮기길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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