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로 국내 가전·반도체 기업을 짓눌러온 유가와 환율, 물류비의 ‘삼중 압박’이 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멈춰 섰던 소비와 투자도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다만 항만과 에너지 시설 복구, 운송 적체 해소에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종전 효과가 곧바로 실적에 반영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16일부터 사흘간 글로벌 전략회의를 열고 가전·TV와 반도체 사업의 하반기 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 직후 열리는 회의인 만큼 중동 공급망과 물류망 정상화, 지역별 수요 회복 가능성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종전은 우선 기업의 비용 계산을 바꾸는 요인이다. 전쟁 기간 국제유가가 오르고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를 둘러싼 불안이 커지면서 해상운임과 원자재 가격도 함께 뛰었다. 원·달러 환율 상승까지 겹치며 해외에서 부품과 장비를 들여오거나 현지 생산시설에 투자하는 기업의 부담이 확대됐다.
가전업계는 물류와 원재료 부담이 낮아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TV와 냉장고, 에어컨 등은 제품 부피가 커 운송비가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유가와 해상운임이 안정되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원가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중동 지역 판매 확대에 나설 여지가 생긴다.
중동은 프리미엄 TV와 생활가전, 스마트폰 수요가 높은 시장으로 꼽힌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자원 부국을 중심으로 전쟁 기간 위축됐던 소비 심리가 회복될 경우 대형 TV와 인공지능(AI) 가전 판매가 다시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데이터센터와 스마트시티 등 기업 간 거래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판매량 회복만으로 수익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중국 업체들은 전쟁과 수요 부진이 이어지는 동안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TV·가전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왔다. 종전으로 시장이 정상화되더라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프리미엄 제품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중저가 시장의 가격 공세에도 대응해야 한다.
반도체업계의 계산은 공급망 안정과 AI 투자 재개에 맞춰져 있다. 국내 업체들은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헬륨과 나프타 등 일부 원료를 중동에서 조달해 왔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정상화되면 원료 수급과 장비 운송의 불확실성이 낮아질 수 있다. 다만 전쟁을 계기로 공급처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는 다변화 전략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가격 안정은 AI 반도체 수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생성형 AI 경쟁이 모델 성능을 넘어 데이터센터와 전력 확보 경쟁으로 번지면서 전력비가 빅테크의 투자 판단을 좌우하는 변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가와 액화천연가스 가격이 안정되면 데이터센터 운영 부담이 낮아지고 미뤄졌던 AI 인프라 투자가 재개될 여지가 있다.
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네트워크 반도체 수요로 이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전략회의에서 본격적인 공급 단계에 들어간 HBM4와 차세대 HBM4E의 시장 대응 방안을 점검할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첨단 공정 수율 개선과 미국 테일러 공장 준비, 대형 고객 확보 전략이 논의될 전망이다.
환율 하락은 반도체 기업에 양면적으로 작용한다. 달러로 벌어들인 매출을 원화로 바꿀 때 얻는 환율 효과는 줄어들 수 있다. 반면 해외에서 첨단 제조장비를 구입하거나 미국 생산시설에 투자할 때 필요한 자금 부담은 낮아진다. 종전 이후의 환율 흐름에 따라 수출 이익과 투자 비용을 다시 따져야 하는 셈이다.
산업계에서는 종전 합의를 경영 환경 정상화의 출발점으로 평가하면서도 회복 속도에는 신중한 모습이다. 전쟁 중 타격을 입은 항만과 에너지 시설을 복구하고 밀린 화물을 처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어서다. 이미 높은 가격에 계약한 원료와 운송비도 일정 기간 원가에 남을 가능성이 있다.
금융시장의 불확실성도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주요국 통화정책 변화와 반도체 업종에 집중된 투자 자금은 기업 가치와 투자심리를 흔드는 요인이다. 전쟁 위험이 낮아졌다는 이유만으로 글로벌 IT 수요와 설비투자가 곧바로 강하게 반등한다고 보기 어려운 배경이다.
종전은 가전·반도체 기업의 손익을 자동으로 개선하는 결과라기보다 멈춰 있던 계산기를 다시 작동시키는 계기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가전은 물류비 하락과 중동 소비 회복을 실제 판매와 수익성으로 연결해야 한다. 반도체는 공급망 안정에 안주하기보다 AI 수요에 맞춘 생산능력과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줄어든 것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유가와 운임, 소비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기업들도 단기적인 비용 하락보다 공급망 다변화와 AI 투자, 중국 업체와의 경쟁까지 종합적으로 살펴 전략을 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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