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스타트업 시장이 2021년 이후 이어진 투자 침체 국면을 벗어나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만 회복의 과실은 모든 지역에 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자본과 인재가 미국 등 일부 지역에 집중되면서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의 양극화가 한층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글로벌 스타트업 분석기관 스타트업 지놈(Startup Genome)이 발표한 '2026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보고서(GSER)'에 따르면 AI 혁명과 지정학적 변화,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 확대가 세계 창업 생태계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AI는 더 이상 하나의 산업군이 아니라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관통하는 범용 기술이 됐다"고 평가했다.
◇ 실리콘밸리 생태계 가치 3조 달러 돌파…격차 더 벌어져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 중심의 집중 현상이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 가치는 3조 달러를 넘어섰다. 세계 2위권 생태계와 비교해도 약 3배 수준에 달하는 규모다. 북미 전체 스타트업 생태계 가치는 지난해 대비 51% 증가하며 전 세계 평균 증가율인 33%를 크게 웃돌았다.
AI 분야에서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AI 네이티브 스타트업 초기 투자금의 약 73%, 후기 투자금의 86%가 북미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글로벌 AI 투자 생태계가 사실상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의미다.
중국 베이징 역시 국가 주도 AI 투자 확대를 바탕으로 AI 자금 유치 규모에서 실리콘밸리와 뉴욕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랐다.
반면 유럽은 창업기업 수에서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했지만 대형 투자와 엑시트 규모에서는 여전히 큰 격차를 보였다.
◇ 스타트업 투자 살아났지만 "모두의 회복은 아니다"
글로벌 스타트업 자금 조달 시장은 지난해부터 반등 신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리즈A 투자 규모는 2025년 465억 달러로 전년 대비 2% 증가했다. 2026년 1분기에는 직전 분기 평균 대비 28% 늘어나며 회복세가 가속화됐다.
후기 투자 시장은 더욱 강한 반등을 기록했다. 2025년 글로벌 후기 투자 규모는 약 2100억 달러로 전년보다 17% 증가했다.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선 수치다.
출구 시장도 살아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스타트업 엑시트 가치는 약 8000억 달러에 달하며 전년 대비 164% 급증했다. IPO와 인수합병 시장이 동시에 회복된 영향이다.
하지만 투자 회복의 중심에는 AI가 있었다. 앤트로픽(Anthropic)과 오픈AI(OpenAI) 등 초대형 AI 기업들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흡수하면서 투자금이 특정 기업과 지역에 몰리는 현상이 더욱 심화됐다.
◇ AI 스타트업 투자 218% 폭증…비AI는 감소
보고서가 가장 주목한 분야는 단연 AI다. 2021년부터 2025년까지 AI 네이티브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21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기술 분야 투자는 36% 감소했다.
기업 가치 상승 폭은 더 가파르다. 2021년 이후 비AI 기술기업의 가치가 101% 증가하는 동안 AI 네이티브 기업의 가치는 969% 급등했다.
AI 스타트업은 투자 속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일반 기술 스타트업이 창업 후 평균 24개월 만에 시드 투자를 유치하는 반면 AI 스타트업은 약 10개월 만에 시드 투자에 성공했다. 시리즈A 투자까지 걸리는 시간도 일반 스타트업보다 훨씬 짧았다.
AI 산업 내부에서도 격차는 존재했다. 생성형 AI 모델 자체를 개발하는 기업보다 AI 에이전트, AI 기반 업무 자동화, AI 서비스 플랫폼 등 응용 서비스 기업이 훨씬 많은 투자와 창업을 이끌었다.
AI 에이전트 기업들은 최근 2년간 시리즈A 투자 규모가 연평균 58% 성장했다.
◇ AI 다음은 국방…투자자 관심 이동
글로벌 투자 자금은 AI뿐 아니라 국방산업으로도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보고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 긴장 고조가 벤처캐피털의 투자 방향을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Defense Tech(방산 스타트업) 분야 시리즈A 투자 규모는 최근 1년 동안 약 60% 증가했다.
과거 ESG 관점에서 방산 투자를 기피하던 유럽 투자기관들도 안보 환경 변화 이후 적극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양자컴퓨팅, 첨단 제조, 로봇, 반도체 등 전략기술 분야 역시 정부와 민간 자본의 관심이 집중되는 영역으로 꼽혔다.
반대로 클린테크 분야는 최근 몇 년간 투자 감소세를 겪고 있다. 다만 에너지 안보 문제가 부각되면서 향후 투자 방향이 다시 바뀔 가능성도 제기된다.
◇ 정부 역할 커졌지만 "인프라만으로는 부족"
보고서는 세계 각국 정부의 역할 확대도 중요한 변화로 지목했다. AI, 반도체, 양자기술, 국방 분야는 막대한 자본과 장기 투자가 필요한 만큼 정부가 투자자이자 구매자, 산업 설계자로 직접 참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유럽연합(EU), 영국, 중동 국가들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전략기술 펀드를 조성하며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다만 보고서는 정부가 AI 데이터센터나 컴퓨팅 인프라 구축에만 집중하는 정책에 대해 경고했다. 스타트업 창업과 스케일업 지원 없이 인프라 투자만 확대할 경우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AI 생태계의 핵심은 결국 인프라가 아니라 혁신 기업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보고서는 단순한 투자 통계를 넘어 글로벌 혁신 경쟁의 방향을 보여준다. AI를 중심으로 자본과 인재가 소수 지역에 집중되고, 정부는 산업정책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으며, 국방·반도체·양자기술 같은 전략 산업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 주요 창업 생태계가 AI 인재 확보와 초대형 투자 유치 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 한국 역시 새로운 성장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스타트업 투자 규모 확대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AI 창업 활성화, 글로벌 자본 유치,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협력 구조 구축, 기술 인재 확보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과제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세계 스타트업 시장은 회복 국면에 들어섰지만 승자와 패자의 경계는 오히려 더 뚜렷해지고 있다. AI가 만들어낸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떤 국가와 도시가 다음 성장의 중심이 될지 관심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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