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이야기 소묘⑤ 작업 단상, 엘리아데를 중심으로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이야기의 온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베스트 영상을 한동안 돌려보았다. 작업을 하다 귀가 심심할 때, 유머러스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다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곤 한다. 그렇게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한동안 듣다 보니, 사람들이 스님께 털어놓는 사연들 속에 어떤 유사성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법륜스님이라는 커다란 상징적 존재 앞에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전문가나 권위자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과 닮아 있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지점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대체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로 모인다는 점이다.
좋은 말씀이란 무엇일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고통을 납득하게 만들어줄 묘법 같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고통 자체보다, 그 고통이 아무 의미 없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감각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연들의 중심에는 고통보다 더 깊은 것, 즉 ‘삶을 이해하고 견디려는 인간의 질문’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말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 가능한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 할까. 어떤 사건은 원인이 밝혀진 뒤에도 쉽게 끝나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일과, 그 일을 내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찾는 일 사이에는 늘 간격이 남는 것 같다.
병, 죽음, 불운처럼 이유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간격은 더 커진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너무 건조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는 질문은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사실 자체는 사건을 설명해 주지만, 그 사건이 남긴 감정까지 곧바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고통을 마음속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말씀’의 안쪽에는 결국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고통을 없애주지 못해도, 마음 안에 들이닥친 고통에 형태와 방향을 만들어 줌으로써 내면 어딘가에 놓일 자리를 만들어 주기에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을 보이지 않는 질서와 연결하고,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운명이나 인연의 흐름 속에 놓으려는 다양한 시도들 말이다. 그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완전한 답을 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고통이 아무 의미 없이 나를 덮친 것만은 아니라는 감각을 만들어 주니까.
이야기의 힘은 해결에 있지 않고, 형상화에 있는 것 같다. 신화가 오래전부터 해온 일도 이와 비슷한데, 신화 속에서 죽음은 저승 이야기로, 자연재해는 신의 분노로, 욕망은 금기와 처벌의 이야기로, 공동체의 불안은 제사와 희생의 이야기로 모습을 얻어왔다.
그렇게 설명되지 않던 공백은 하나의 형상을 얻고, 막연한 공포는 이야기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이 된다.
이야기의 아지랑이
다만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이야기가 시련을 견디게도 하지만, 그 힘이 너무 커지면 현실의 원인과 책임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때로 거대한 뜻이나 운명의 결과보다 여러 선택과 조건이 겹쳐 생긴 일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버리면, 삶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또 다른 위험은 고통을 너무 빨리 의미화해 버리는 데 있다. 어떤 고통은 해석되기 전에 먼저 고통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어떤 일은 견디기 전에 먼저 살펴보고 바꾸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 “이것이 나를 성장시킬 것이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시련에도 뜻이 있다” 같은 말들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아픈 일을 아픈 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문장의 위험도 내포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가 현실보다 먼저 와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사실을 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현실을 대체하는 ‘환상’이 된다. 그 환상의 온기는 따뜻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할 위험도 공존한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이야기의 온기가, 어느 순간 삶의 상(像)을 조금씩 휘어져 보이게 하는 아지랑이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균형이 아닐까? 이 균형의 가장 위태로운 차이는 이야기가 현실을 포함하느냐, 아니면 현실을 대신하느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현실을 지우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인 다음 그 현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드는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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