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호르무즈 포성 멎어도 끝나지 않은 ‘페트로달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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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1 00:00 기준

[기자수첩] 호르무즈 포성 멎어도 끝나지 않은 ‘페트로달러 전쟁’

뉴스로드 2026-06-17 10:13: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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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이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평화협정 중재 홍보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중재했다’는 문구와 함께 ‘긴급 알림’ ‘역사적 성과’라는 표현이 담겼다. [사진=미 백악관]
미국 백악관이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평화협정 중재 홍보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중재했다’는 문구와 함께 ‘긴급 알림’ ‘역사적 성과’라는 표현이 담겼다. [사진=미 백악관]

미국과 이란이 평화 합의에 도달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지난 15일 이를 환영하며 지난 2월 28일 충돌이 시작된 이후 호르무즈 해협과 인근 해역에서 국제 선박을 겨냥한 공격을 최소 46건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역에 고립된 선원 수천 명을 대피시키기 위한 작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17일 기자는 미국과 이란의 평화 합의 소식을 접하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는 또 다른 경쟁을 떠올렸다. 원유 1배럴에 어느 화폐로 가격을 매길 것인지, 어느 통신망으로 결제 지시를 보낼 것인지, 사고와 제재 위험은 누가 보험으로 떠안을 것인지, 산유국이 벌어들인 돈은 어느 나라의 국채로 돌아갈 것인지의 경쟁이다. 이 오래된 국제질서의 이름이 바로 페트로달러다.

패트로달러 [사진=연합뉴스]
패트로달러 [사진=연합뉴스]

▲페트로달러는 네 기둥으로 작동한다

페트로달러를 ‘석유 대금을 달러로 결제하는 관행’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이는 금융과 법률, 해운, 안보가 맞물린 국제질서다.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은 네 개다.

첫째는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두바이유에 달러 가격표를 붙이는 ‘가격표시’다. 원유 가격이 달러로 표시되면 정유사와 무역회사, 은행과 선사는 거래를 위해 달러를 확보해야 한다. 둘째는 산유국이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국채와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환류’다. 오일머니가 미국 시장으로 돌아오면서 미국은 대규모 재정적자를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셋째는 달러 거래가 통과하는 ‘결제 시스템’이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가 결제 메시지를 전달하고, CHIPS가 은행 간 달러 거래를 청산하며,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Fedwire가 최종 결제를 처리한다. 넷째는 미국이 걸프 산유국의 안보를 뒷받침해 온 ‘안보 질서’다. 산유국에 결제 통화의 선택은 환율이나 수수료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과 영토, 수송로의 안전과 연결돼 있다.

가격표가 거래 수요를 만들고, 오일머니의 환류가 미국 국채시장의 깊이를 키우며, 결제망이 미국에 거래를 들여다보고 차단할 힘을 준다. 여기에 안보동맹이 더해진다. 페트로달러는 달러 지폐나 원유 한 상품이 아니라 네 기둥이 서로를 강화하는 지정학적 체제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페트로달러를 둘러싼 대표적인 오해도 걷어낼 수 있다. 가장 널리 퍼진 주장은 이른바 ‘1974년 비밀협정’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50년 동안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속했고, 이 협정이 2024년 6월 만료되면서 달러 패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 양국이 만든 것은 미·사우디 경제협력 합동위원회였다. 사우디의 오일머니를 미국 국채와 무기, 기술, 인프라 구매로 되돌리는 협력 구조는 존재했다. 석유의 달러 결제를 50년간 강제한 비밀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트로달러 체제는 특정 문서 한 장이 아니라 가격표시와 환류, 결제망, 안보가 결합하면서 형성됐다.

인과관계도 흔히 알려진 것보다 복잡하다. 석유를 달러로 거래하면서 달러의 힘이 커진 것은 맞다. 그러나 달러가 이미 가장 유동적이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화였기 때문에 석유 거래의 표준이 됐다는 설명도 성립한다. 협정 한 장으로 만들어진 질서라면 협정을 폐기해 끝낼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국채시장과 법률, 보험, 결제망, 거래 관행이 만든 질서는 한 국가의 선언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수치도 달러가 당장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과 거리가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5년 4월 세계 외환거래의 89.2%에서 달러가 거래의 한쪽을 차지했다. 2022년 88.4%보다 높아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보유액 통계에서 달러 비중은 2025년 3분기 56.92%였다. 20여 년 전 70%를 웃돌던 때와 비교하면 낮아졌지만, 유로와 엔화, 파운드화, 위안화를 크게 앞선다.

최근 달러 비중의 하락 가운데 상당 부분은 중앙은행이 달러 자산을 대거 처분한 결과라기보다 환율 변화에 따른 평가효과로 설명된다. 달러 가치가 내려가고 유로와 엔화 등 비달러 자산의 환산 가치가 오르면 달러 비중은 실제 매매가 없어도 낮아질 수 있다. 자산 가격의 변화를 곧바로 체제 전환의 증거로 읽는 것은 탈달러 논쟁에서 자주 나타나는 오류다.

그렇다고 달러 질서가 영원하다는 뜻도 아니다. 페트로달러는 한꺼번에 붕괴하기보다 네 기둥이 서로 다른 속도로 약해지는 쪽에 가깝다. 미국의 셰일 혁명은 중동 원유와 미국의 안보 보장을 맞바꾸던 구조를 느슨하게 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 동결은 달러 자산도 지정학적 충돌이 발생하면 동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서방 국가들에 각인시켰다. 중국의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과 다중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결제망은 뉴욕의 환거래 은행을 거치지 않는 길을 넓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달러의 힘은 집단적 신뢰에서 나온다

화폐의 위상을 금리와 유동성, 안전성만으로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화폐에는 집단적 신뢰가 필요하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따라 욕망한다고 봤다. 욕망은 개인과 대상 사이에서 직접 발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라는 모델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이다.

통화 선택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중앙은행이 달러를 보유하는 것은 달러 자체에 초월적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중앙은행도 달러를 보유하고, 국제은행도 달러를 받아주며, 원유 거래자도 달러 가격표를 사용하고, 투자자도 달러 자산을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달러는 가치가 있어 선택되지만, 모두가 계속 선택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 가치가 유지되기도 한다. 페트로달러는 금융시스템인 동시에 거대한 모방시스템이다.

필리프 슈테르처의 '제정신이라는 착각'은 이를 인지과학의 언어로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외부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먼저 세계에 대한 예측 모델을 만들고, 실제 정보와 예측 사이의 차이인 ‘예측 오차’를 수정해 나간다. 어떤 정보에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둘 것인지는 ‘정밀도’가 좌우한다.

달러 역시 시장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예측 모델이다. 중앙은행과 기업, 투자자는 달러가 앞으로도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예상에 따라 달러를 사고, 달러로 계약하며, 달러 자산을 축적한다. 예측이 행동을 만들고, 그 행동이 다시 예측을 현실로 만든다.

탈달러 논쟁에서는 이 정밀도의 배분이 자주 왜곡된다. 일부 원유 거래가 위안화로 결제되거나 중앙은행의 금 매입이 늘고, 새로운 디지털 결제망이 등장하면 이를 곧바로 달러 패권 붕괴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달러의 현재 비중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변화 가능성을 모두 부정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사건이 실제로 가격표시와 준비자산, 법률, 보험, 선박금융의 구조를 바꾸고 있는지 가려내는 일이다. 위안화 결제가 늘었다고 미국 국채를 대신할 안전자산 시장과 영국법을 대신할 계약 질서가 함께 이동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체 인프라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그 성장 가능성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통화에 대한 인식은 빠르게 바뀔 수 있지만, 계약과 제도의 세계는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지라르의 시선으로 보면 달러와 위안화의 경쟁에는 또 다른 역설이 있다. 중국은 달러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그 질서가 가진 기능을 재현하려 한다. 독자적인 국제결제망을 만들고 역외 유동성을 공급하며, 원자재의 위안화 결제를 늘리고 디지털 금융 인프라를 구축한다.

적대하는 양측이 경쟁 과정에서 서로를 닮아가는 것을 지라르는 ‘짝패’라고 불렀다. 달러와 위안화의 경쟁도 전혀 다른 체제의 대결이라기보다 결제망과 안전자산, 유동성 공급, 금융 감시 능력을 놓고 서로의 기능을 모방하는 경쟁에 가깝다.

달러를 모든 국제경제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부채와 자본 유출, 금융제재, 불평등을 모두 페트로달러 탓으로 돌리면 설명은 쉬워진다. 그러나 달러를 제거한다고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위안화 결제망도 거래를 기록하고 접근권을 통제한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도 누가 누구에게 돈을 보냈는지 추적할 수 있다. 달러의 감시에서 벗어난 거래가 다른 국가의 감시망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희생양을 바꾼다고 작동 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Fed]
[사진=Fed]

▲결제망은 통화보다 강한 권력이 된다

결제망은 감시망이기도 하다. SWIFT는 돈을 직접 옮기는 기관이 아니라 은행 간 지급 지시를 전달하는 메시지망이다. 실제 달러 청산과 최종 결제는 CHIPS와 Fedwire를 통해 이뤄진다. 메시지와 청산, 최종 결제를 구분해야 미국 금융제재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달러를 발행하기 때문에 강한 것만이 아니다. 이 배관에 들어오고 나갈 권한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강하다.

달러 질서를 시장이 선택한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시카고학파와 로널드 코스의 거래비용 이론을 빌리면 원유 거래자는 이념보다 비용을 계산한다. 계약서 작성과 환헤지, 담보 설정, 금융조달, 회계처리, 분쟁 해결까지 가장 적은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는 통화를 선택한 결과가 달러라는 것이다. 은행과 선주, 보험사, 원유 거래상이 모두 달러를 쓰는 상황에서 다른 통화로 옮기는 데는 추가 비용이 든다.

그러나 왜 그 네트워크가 달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시장의 선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발터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시장이 자연 상태가 아니라 법과 제도가 만든 질서 안에서 작동한다고 본다. 재산권과 계약 집행, 통화제도와 경쟁정책이 마련돼야 시장의 자유도 성립한다.

국제 원유 거래 역시 미국 국채시장과 연준의 유동성 공급, 뉴욕의 청산망, 영국과 미국의 법률, 해상보험과 선박금융, 미국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제재 체계 위에서 움직인다. 달러는 시장에서 선택된 통화인 동시에 국제 금융질서의 운영체제다.

존 롤즈의 관점에서는 다른 질문이 나온다. 세계 경제에 참여하려면 특정 국가의 결제망과 법체계를 사실상 통과해야 하는 구조가 공정한가 하는 문제다. 달러 체제는 깊은 유동성과 위기 때 사용할 수 있는 안전자산을 제공한다. 동시에 미국에 결제망 접근과 제재, 금융 감시에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다.

권한을 완전히 분산하면 공정성은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누가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고 시장을 안정시킬지는 불분명해진다. 탈달러 논쟁의 본질은 통화 하나를 다른 통화로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안정성과 공정성, 효율성과 주권 사이에서 누가 국제경제의 규칙을 설계하고 예외를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다.

미 달러 [사진=연합뉴스]
미 달러 [사진=연합뉴스]

▲패권의 균열은 믿음에서 시작된다

조지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은 이 질서가 어떻게 강해지고, 어떻게 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로스는 인간이 현실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오류가능성’과,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인식이 행동을 거쳐 현실 자체를 바꾸는 ‘재귀성’을 함께 봤다. 금융시장 참가자는 현실을 관찰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바꾸는 행위자다.

미국 국채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에 수요가 몰리고, 막대한 수요와 유동성 때문에 미국 국채는 다시 안전자산으로 평가된다. 산유국은 모두가 달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달러로 원유를 팔고, 원유 거래가 달러로 이뤄지기 때문에 다른 참가자도 달러를 선택한다. 페트로달러는 이러한 자기강화 과정이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결과다.

대체 질서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 산유국이 원유 일부를 위안화로 판매하면 CIPS의 결제량이 늘어난다. 결제량 증가는 네트워크의 경제성을 높이고 더 많은 참가자를 불러들인다. 거래가 쌓이면 그 주변에 위안화 무역금융과 보험, 선박금융, 법률 서비스가 생겨날 수 있다. 통화 사용의 증가가 제도를 만들고, 제도의 성장이 다시 통화 사용을 늘리는 순환이다.

현재 위안화와 CBDC, 대체 결제망은 달러를 대체할 만한 규모와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결제량 증가가 금융 인프라 확충으로 이어지고, 확대된 인프라가 다시 결제량을 끌어올리는 임계점을 넘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달러 질서의 가장 큰 위험도 환율 하락 자체가 아니다. 달러 자산의 정치적 중립성과 미국 결제망 접근권의 안정성, 미국법의 예측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진짜 위험이다. 신뢰가 흔들리면 자산 다변화가 늘고, 자산 다변화는 대체 인프라 구축을 촉진한다. 대체 인프라의 성장은 다시 달러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패권은 힘으로 유지되지만, 그 힘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도 유지된다.

따라서 페트로달러의 미래는 ‘붕괴한다’와 ‘영원하다’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이분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이 강조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확률이었다. 가능한 시나리오를 나열하고 각각의 발생 가능성과 피해 규모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생 가능성이 낮아도 손실이 파국적이면 대비해야 한다.

당장 달러를 대신할 만큼 깊고 유동적인 자본시장이 나타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비달러권에서 결제와 자산 운용은 물론 선박금융, 해상보험, 중재, 담보권 집행까지 가능한 생태계가 등장한다면 충격은 크다. 페트로달러의 방어선은 달러 지폐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이 수백 년에 걸쳐 쌓은 법률·금융 네트워크다.

[사진=LMAA]
[사진=LMAA]

▲달러의 방어선은 영미 법·금융 생태계다

페트로달러의 진짜 방어선은 달러 지폐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이 수백 년에 걸쳐 쌓은 법률·금융 네트워크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원유를 실은 선박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용선계약과 선하증권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분쟁은 런던해사중재인협회(LMAA) 중재나 영국 고등법원 해사법원에서 처리된다. 선박금융은 선박 저당권과 담보 집행 체계에 의존하고, 책임 위험은 국제 P&I 클럽들이 인수한다.

영국의 1981년 고등법원법에 근거한 물적소송은 채권자가 선주 개인이나 회사뿐 아니라 선박 자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허용한다. 항구에 입항한 선박을 체포해 채권 회수를 시도할 수 있고, 해사유치권과 선박우선특권에 따라 채권의 순위도 결정된다. 이러한 집행 가능성이 국제 선박금융과 보험의 토대다.

여기에 미국의 금융제재가 결합한다. 국제 거래 참가자들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과 적성국교역법, OFAC 제재 규정을 살펴야 한다. 제재 대상자가 기업 지분을 합계 50% 이상 보유하면 해당 기업도 제재 대상으로 보는 이른바 ‘50% 규칙’도 있다. 달러 거래가 미국 금융시스템을 통과하면 미국법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이유다.

중국이나 브릭스 국가들이 위안화 결제를 늘리는 것과 독립된 해운·금융 질서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다. 자체 선박금융과 해상보험, 중재기관, 선박등록제도, 담보권 집행 체계까지 갖춰야 한다. 선박은 몇 년이면 건조할 수 있지만 판례와 계약 이행을 통해 쌓이는 법적 신뢰는 단기간에 만들기 어렵다.

위안화 국제화의 속도보다 비달러권이 법률과 보험, 금융, 해운을 하나의 회로로 연결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하는 이유다. 달러 밖에서도 선박이 운항되고, 보험이 제공되며, 계약이 집행되고, 자본이 순환하는 완결된 국제질서가 나타날 때 페트로달러의 장기적 균열도 본격화할 수 있다.

신현송 신임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신현송 신임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디지털화폐는 통화보다 결제 인프라를 바꾼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블록체인 결제망이 이 구조를 한꺼번에 뒤집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기술은 결제 속도와 비용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 질서를 결정하는 것은 처리 속도뿐 아니라 법적 집행력과 유동성, 안전자산, 지정학적 신뢰다. 원유 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몇 초 만에 결제가 끝나느냐보다 받은 돈을 안전하게 보유하고 필요할 때 현금화하거나 재투자할 수 있느냐다.

신현송 현 한국은행 총재가 국제결제은행(BIS) 경제고문 겸 통화경제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제안한 ‘통합원장’은 중앙은행 준비금과 상업은행 예금, 국채 등 다양한 금융자산을 하나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장부에서 연결하는 구상이다. 현행 국제결제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가 지급 메시지를 전달하고, 환거래은행과 청산기관이 거래를 대조·청산한 뒤 중앙은행 화폐로 최종 결제하는 다층 구조로 이뤄진다. 통합원장은 이처럼 분리된 거래 확인과 청산, 결제 과정을 하나의 디지털 환경에 묶어 비용과 시간을 줄이려는 시도다.

BIS가 추진하는 프로젝트 아고라와 다중 CBDC 실험도 새로운 세계통화를 만드는 사업이라기보다 기존 통화와 금융시스템을 연결하는 데 무게를 둔다. 이는 물을 바꾸는 일보다 배관을 고치는 일에 가깝다. 결제망이 아무리 빨라져도 중앙은행과 기업이 그 통화와 자산을 믿지 않으면 국제통화의 위상을 얻기 어렵다.

동시에 달러의 위험도 여기에 있다. 달러가 가격표시와 준비자산의 지위를 유지하더라도 결제 배관은 다극화할 수 있다. CIPS와 지역 결제망, 다중 CBDC 플랫폼이 확대되면 거래 당사자는 반드시 뉴욕을 거치지 않고도 자금을 이동시킬 수 있다. 이는 달러의 가치보다 미국의 금융 감시와 제재 능력을 먼저 약화시킬 수 있다.

러시아 제재 이후 여러 국가가 가장 먼저 고민한 것도 달러를 완전히 버리는 방법보다 미국 금융망을 우회하는 방법이었다. 국제정치에서 국가는 통화 보유뿐 아니라 결제망에서 퇴출될 위험을 본다. 미래의 경쟁이 달러 대 위안화의 통화 전쟁보다 SWIFT·CHIPS·Fedwire와 CIPS·CBDC 사이의 결제 인프라 경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미국은 범용 CBDC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에는 비교적 열린 접근을 보여 왔다. BIS가 중앙은행 화폐를 중심으로 공공·민간 금융을 연결하려 한다면 미국은 민간 금융기관과 시장을 활용해 달러를 디지털 공간으로 확장하려 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달러 예금과 미국 국채를 주요 준비자산으로 사용하면 디지털 결제의 성장이 달러와 미국 국채 수요로 이어질 수도 있다.

CBDC와 통합원장, 스테이블코인은 페트로달러를 무너뜨리는 혁명일 수도 있지만 기존 체제가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통합원장이 거래의 마찰을 낮출 수는 있어도 국가 사이의 공포와 불신까지 결제해 주지는 않는다. 모든 거래를 하나의 원장에 연결할수록 누가 그 원장을 관리하고 접근권을 통제할 것인지라는 정치적 문제도 커진다.

[사진=인베스팅닷컴]
[사진=인베스팅닷컴]

▲달러의 진입장벽은 제도와 지식이다

달러의 힘은 기술뿐 아니라 제도와 지식의 축적에서 나온다. 로버트 루카스가 경제성장의 원천으로 인적 자본과 학습을 강조했듯, 뉴욕과 런던에는 금융공학과 리스크 관리, 국제회계와 법률 서비스, 신용평가와 파생상품 운용 역량이 수십 년 동안 쌓였다.

조엘 모키르는 기술 발명만큼 지식을 생산하고 검증하며 확산하는 제도가 중요하다고 봤다. 필리프 아기옹은 혁신이 연구개발 투자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과 제도가 결합한 환경에서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금융시장은 위기와 규제 변화, 기술 혁신을 흡수하며 제도를 바꿔 왔다. 달러의 경쟁력은 발행권만이 아니라 이런 지식과 적응 능력에 있다.

마크 멜리츠의 기업 이질성 이론을 금융시장에 적용하면 자본은 거래비용이 낮고 유동성이 깊은 시장으로 몰린다. 미국 국채시장에 투자자가 집중할수록 거래량은 늘고 비용은 내려간다. 높아진 유동성은 다시 새로운 자본을 끌어들인다. 위안화로 원유를 결제할 수는 있어도 세계의 중앙은행과 연기금, 금융회사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안전자산 시장을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려운 이유다.

앨런 그린스펀이 금융시장에서 신뢰와 유동성을 중시하고, 벤 버냉키가 금융위기의 핵심을 신용중개 기능의 붕괴와 안전자산 부족에서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충격,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금은 달러 현금과 미국 국채로 이동했다. 달러는 국제결제 수단인 동시에 위기 때 세계 금융시스템이 의존하는 안전자산 체계의 중심이다.

로널드 드워킨의 자원 평등론은 자원의 분배뿐 아니라 위험을 어떻게 나눌지를 함께 봐야 한다고 제시한 것처럼 국제통화 질서도 환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산유국과 투자자, 선주와 금융기관은 위기 때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지, 계약이 보호되는지, 어느 법원이 분쟁을 해결하는지, 제재와 전쟁 위험을 누가 떠안을 것인지까지 계산한다. 달러 질서의 힘은 화폐 자체뿐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고 손실을 처리하는 보험 기능에 있다.

삼성중공업이 수주한 미국 델핀(Delfin) LNG 프로젝트용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FLNG) 이미지. 미국 최초의 FLNG 사업으로 평가받는 델핀 프로젝트는 기존 육상 LNG 플랜트 대신 해상에서 천연가스를 생산·액화하는 방식이 특징이다. 삼성중공업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29억달러(약 4조3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확보했으며, 미국 LNG 수출 확대와 에너지 안보 강화의 핵심 인프라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미국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그래픽. [그래픽=최지훈 기자]
삼성중공업이 수주한 미국 델핀(Delfin) LNG 프로젝트용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FLNG) 이미지. 미국 최초의 FLNG 사업으로 평가받는 델핀 프로젝트는 기존 육상 LNG 플랜트 대신 해상에서 천연가스를 생산·액화하는 방식이 특징이다. 삼성중공업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29억달러(약 4조3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확보했으며, 미국 LNG 수출 확대와 에너지 안보 강화의 핵심 인프라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미국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그래픽. [그래픽=최지훈 기자]

▲한국, LNG선·보험·결제망 경쟁에 대비해야

미국이 중국의 조선·해운 지배력을 무역법 301조 조사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2025년 4월 중국 선주와 중국 건조 선박에 항만 수수료를 부과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후 미·중 합의에 따라 같은 해 11월부터 해당 조치를 1년간 유예했지만, 미국이 조선과 해운을 산업 문제를 넘어 국가안보와 금융질서의 기반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탱커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은 화물을 옮기는 배이면서 에너지와 화폐를 잇는 물리적 인프라다. 석유의 비중이 낮아지고 LNG 교역이 늘어나면 LNG선은 가스 시대의 페트로달러 인프라가 된다. 어느 나라가 선박을 만들고 누가 금융을 제공하며, 어느 보험사가 위험을 인수하고 어느 법원이 분쟁을 처리하는지가 결제 통화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기회와 약점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 고부가가치 탱커와 LNG선을 건조하지만 선박금융과 해상보험, 중재와 결제 데이터에서는 런던과 뉴욕의 질서에 의존한다. 앞으로의 경쟁은 선박 수출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박금융과 P&I 보험, 제재 준수, 전자선하증권, 복수 통화 결제, 환위험 관리를 하나의 생태계로 묶어야 한다.

달러권과 비달러권이 나뉠수록 어느 결제망과 보험망에서도 선박을 운항할 수 있는 능력이 한국 조선·해운산업의 경쟁력이 된다. 선박만 건조하는 국가와 선박을 둘러싼 금융·법률·데이터까지 제공하는 국가의 부가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페트로달러를 위협하는 것은 위안화 지폐 한 장이나 CBDC 하나가 아니다. 가격표는 달러인데 결제망은 중국식이고, 준비자산은 금이며, 계약은 영국법을 따르고, 선박은 한국에서 건조되는 분절된 질서가 다가오고 있다. 한 통화가 다른 통화를 완전히 밀어내는 교체보다 가격표시와 결제, 가치 저장, 법률, 운송이 서로 다른 권력에 나뉘는 세계다.

미·이란 평화 합의는 포성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원유의 가격표와 국채 장부, 보험증권과 선박 계약에 뿌리내린 질서는 전쟁보다 오래간다. 이제 따져야 할 것은 달러가 언제 무너지느냐가 아니다. 세계 에너지 거래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달러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있는지, 그 바깥에 법과 보험, 선박과 안전자산을 두루 갖춘 독자적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더글러스 노스가 강조한 것도 경제의 장기적 성패를 가르는 것은 기술 하나보다 사람들이 미래의 약속을 믿게 만드는 제도라는 점이었다. 자산과 돈을 동시에 결제하는 기술은 만들 수 있다. 국가의 공포와 불신까지 동시에 결제할 수는 없다. 페트로달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가장 빠른 기술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도 끝까지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질서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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