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에서 터진 이란 전쟁의 불길이 전 세계 물류망을 타고 동아시아의 식탁 물가까지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물류의 가장 중요한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장기화되면서 석유화학 공급망이 마비되자,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바나나'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모양새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급격한 기후 변화와 곰팡이성 전염병 확산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인류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과일이자 필수 식량 작물인 바나나의 생산 기반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일본 바나나 시장 50년 만의 대위기
일본에서는 국민 과일로 꼽히는 바나나 공급에 비상등이 켜졌다. 바나나는 장거리 해상 운송 중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지에서 익지 않은 초록색 상태로 배에 실어 수입한 뒤, 소비국 가공 공장에서 익히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식물이 스스로 익도록 돕는 천연 가스인 에틸렌을 뿌려 노랗게 가공한다.
문제는 이 에틸렌 가스를 만드는 원료가 바로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화학 물질인 '나프타'라는 점이다.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는 일본은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나프타 생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올해 들어 일본 내 나프타 재고량은 25%나 감소했다. 공급망 마비 여파로 도쿄의 바나나 소매가격은 2022년과 비교해 30% 이상 치솟았으며, 일본바나나수입협회는 반세기 만에 닥친 최악의 공급 부족 사태라고 상황을 전했다.
포장재 잉크마저 동났다… 석유화학 마비가 전방위로 뻗친 연쇄 충격
나프타 정제 중단으로 발생한 파장은 식품뿐만 아니라 이를 감싸는 포장재 산업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석유화학 제품 공급줄이 묶이면서 포장재 인쇄에 꼭 들어가는 플라스틱 화합물 성분의 잉크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한 거대 과자 제조업체는 인쇄용 잉크 공급이 부족해지자 간판 상품인 감자 칩을 비롯한 일부 과자류의 포장 상자를 화려한 유색 디자인에서 검은색과 흰색만 사용하는 흑백 포장으로 긴급 변경했다. 전쟁이 유발한 물류 차단이 과일의 가공 과정을 멈추게 한 것을 넘어, 일반 소비재의 외관과 유통 방식까지 강제로 바꾸어 놓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태풍에 부러지고 전염병에 녹아내리고
전쟁이라는 단기적 악재 너머에는 기후 변화라는 더 거대한 장기적 시한폭탄이 작동하고 있다. 영국의 기아 퇴치 자선 단체인 크리스천에이드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강력한 태풍과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전 세계 바나나 수확량이 가파르게 감소하고 있다.
바나나는 자라는 과정에서 다량의 물이 요구되면서도 줄기가 약해 비바람에 쉽게 부러지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전 세계 수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은 기후 위기로 인해 해마다 허리케인의 발생 빈도와 파괴력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는 지역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온이 오르면서 파나마병 등 바나나 나무를 말라 죽게 만드는 곰팡이성 균까지 빠른 속도로 번지며 농가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단일 품종 ‘캐본디시’의 한계… 4억 명의 필수 식량 보존 비상
바나나가 이 같은 환경 변화에 유독 취약한 까닭은 ‘캐본디시’라는 단 한 가지 품종만을 집약적으로 재배해 온 탓이다. 씨가 없고 뿌리를 잘라 복제하듯 키우는 재배 방식 때문에 생물학적 성질이 모두 똑같다. 이로 인해 유전적 면역력이 전무한 상태여서, 변종 전염병이나 기후 변동이 들이닥치면 집단 폐사를 피할 수 없다.
보고서는 이대로 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오는 2080년에는 현재 바나나 주산지의 3분의 2에 달하는 면적이 농사지을 수 없는 땅으로 변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바나나는 밀, 쌀, 옥수수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식용 작물이며, 전 세계 4억 명 이상의 인구가 하루 섭취 열량의 최대 27%를 바나나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국제 사회가 이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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