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본래 목적인 노후소득 보장에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금융기관 중심의 지배구조를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기금형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처방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정창률 단국대 교수는 국민연금연구원 '연금포럼' 2026년 봄호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개혁안을 제시했다.
◇ 저수익 고비용 구조의 근본 원인
현행 계약형 지배구조가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됐다. 제도 설계 당시 금융시장 육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금융기관이 주도권을 쥐게 됐고, 투자 결정권은 전문성이 부족한 개인과 기업 인사담당자에게 떠넘겨졌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자산이 쏠리는 현상이 굳어진 배경이다. 국민연금 수익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연평균 2.86%라는 저조한 성과가 최근 5년간 이어졌다. 반면 금융기관들은 매년 약 2조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아무런 규제 없이 수취하고 있다.
◇ 조기 소진되는 연금 자산
노후까지 자산이 쌓이지 못하고 중도에 빠져나가는 구조적 허점도 심각한 수준이다. 주택 구입 등을 명목으로 한 중도인출 조건이 과도하게 느슨하며, 이직 시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로 옮겨진 돈은 약간의 세금 불이익만 감수하면 이유 없이 해지가 가능하다. 2024년 한 해 동안 6만7천명이 중도인출로 3조원을, 99만2천명이 해지를 통해 14조5천억원을 각각 꺼내 갔다. 종신연금 개념 자체가 설계에서 빠져 있어 정해진 기간만 분할 수령하거나 일시금으로 받는 관행이 보편화됐다. 2023년 평균 수령액을 보면 연금 계좌는 1억3천976만원인 반면 일시금 계좌는 1천645만원에 그쳤다. 자산이 적은 가입자일수록 일시금을 택해 노후 자금을 급속히 탕진하는 패턴이 확인된다.
◇ 방치된 규제와 행정 공백
국가의 수급권 보호 기능도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확정급여형(DB) 도입 사업장 가운데 절반이 적립 부족 상태이나 과태료 부과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확정기여형(DC) 사업장 약 10%에서 사용자 보험료 미납이 발생하지만 지연이자 규정 부재로 손해가 고스란히 가입자에게 전가된다. 영세 사업장의 낮은 가입률 탓에 전체 임금 체불의 40%가 퇴직금 미적립과 연결돼 있다. 매년 수조원의 세제 혜택이 투입되면서도 복지시장 실패와 노후소득 체계 붕괴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정 교수의 비판이다.
◇ 기금형 전환과 제도 일원화가 급선무
단기 개혁의 핵심 과제로 기금형 지배구조 도입이 제시됐다. 기업 또는 산별 단위로 수탁법인과 이사회를 구성하고, 노사 공동 참여 아래 전문가가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근로자가 제도의 주체로 참여하게 되며 중장기 개선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퇴직금과 퇴직연금으로 쪼개진 이원 체계를 적립식 퇴직연금으로 통합하는 작업도 시급하다. 사용자 도산 시 체불 위험을 원천 차단해 중소기업 근로자 보호를 강화하려는 취지다. 중소기업의 정기 납입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 재정지원이나 임금채권보장제도 개편을 통한 사외 적립 유도가 필요하다. 일원화가 실현되면 근로복지공단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이 공공 플랫폼으로 활성화돼 높은 수익률로 노후소득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 적립 부족과 보험료 미납에 대한 적극적 행정 대응도 단기 실행 과제로 꼽혔다.
◇ 장기 축적·종신연금 확대 방안
중장기적으로는 중간정산과 해지 요건을 점진적으로 강화해 연금 자산의 장기 축적을 유도해야 한다. 많은 근로자가 지출 계획에 중간정산·해지를 포함해 온 만큼 즉각 폐지는 어렵다. 해지 조건을 먼저 엄격히 하고 중간정산 인출 범위를 축소하는 단계적 접근이 현실적이다. 적립금 규모가 커질수록 일시금 선호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어 자산을 묶어두는 장치가 필수라고 정 교수는 조언했다. 기금형 구조가 안착한 뒤에는 일부 기금부터 수명 위험을 보장하는 종신연금 지급을 도입해야 한다. 현재 제도는 총자산 규모만 확정할 뿐 개인별 수명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실질적 다층 소득보장 체계 구축을 위해 종신연금 전환이 불가피하다. 1년 미만 근속자 배제 규정 폐지와 가입 대상 확대, 근로계약 없이 유사 직무를 수행하는 노무 제공자 포함 문제도 중장기 검토 과제로 함께 다뤄져야 한다고 정 교수는 덧붙였다.
Copyright ⓒ 나남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