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047810) 지분을 9%대로 끌어올리며 국내 우주·항공 산업 재편의 전면에 섰다. KAI와의 협력 기반을 강화해 대한민국 안보 역량을 높이고, 우주·항공 분야의 글로벌 수출 경쟁력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는 16일 KAI 지분 6.50%를 확보했다고 공시했다. 지난 5월 4일 연말까지 5000억원을 투입해 KAI 지분을 추가 매입하겠다고 밝힌 계획을 조기에 달성한 것이다. 한화시스템(272210)도 1250억원을 들여 KAI 주식을 추가 취득하면서 지분율을 1.53%까지 높였다.
이에 따라 한화그룹이 보유한 KAI 지분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USA(HAUSA)의 1.01%를 포함해 총 9.04%가 됐다. 수출입은행의 26.41%에 이어 KAI 2대 주주에 올라선 것으로, 한화는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를 넘어 산업적 협력과 전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넓혔다.
◆ KAI 지분 12% 이상 확대…글로벌 '우주·항공 경쟁 구도' 변화에 대응
지분 확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같은 날 이사회를 열고 연말까지 5000억원을 추가 투입해 KAI 지분을 더 사들이기로 했다. 15일 KAI 종가 14만7600원을 기준으로 하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지분율은 9.97%까지 올라갈 수 있고, 그룹 전체 KAI 지분은 12%를 넘어설 전망이다.
한화는 앞서 KAI 지분 보유 목적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변경 공시했다. 다만 경영 참여는 적법한 절차와 주주 권한 안에서 이뤄진다는 입장이다. KAI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을 경우 회사의 경영 목적과 주주,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관련 사안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번 지분 확대의 핵심 배경에는 우주·항공 산업의 경쟁 구도 변화가 있다. 글로벌 시장은 스페이스X로 대표되는 민간 주도 우주산업 경쟁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우주는 더 이상 발사체나 위성 개발에 그치지 않고 인공지능(AI), 통신, 정찰, 기상, 항법 인프라와 결합한 전략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주요 선진국도 우주산업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 기반으로 보고 장기 투자와 기업 대형화, 산업 통합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스페이스X는 지난 12일 현지시간 공모가 135달러로 나스닥에 상장한 뒤 2거래일 연속 주가가 19%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15일 종가는 192.5달러였고 시가총액은 2조5200억달러 수준까지 불어났다. 이번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만 857억달러, 우리 돈 약 130조원 규모다. 글로벌 우주산업이 기술 경쟁을 넘어 자본력과 규모의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면 국내 우주·항공 시장은 규모가 제한적이고 민간 자본 투입도 충분하지 않다. 정부 예산 역시 주요국과 비교하면 아직 작다. 올해 우주항공청 예산은 1조1201억원 수준이다. KAI의 우주사업도 독자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시장에 선제적으로 진입하기에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한화는 이 같은 환경에서 KAI와의 협력이 중복 투자를 줄이고 국가 차원의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화는 30년 넘게 항공엔진, 항공전자, 레이더, 위성, 우주 발사체, 지상방산 분야에 투자해 왔다. KAI는 국내 유일의 완제기 개발·제작 업체로 T-50, FA-50, KF-21 등 항공기 개발 역량을 축적했고 위성 개발과 공중전투체계 분야에서도 기술 기반을 갖고 있다.
양사의 역량이 결합하면 발사체부터 위성 제작, 지상체계, 우주서비스까지 이어지는 국내 최대 우주산업 밸류체인을 구축할 수 있다. 글로벌 고객은 이제 단일 장비나 부품보다 발사, 제작, 운용, 서비스가 연결된 통합 솔루션을 요구한다. 한화와 KAI가 각자 투자와 개발을 반복하는 방식보다 하나의 사업 구조 안에서 역할을 나누고 역량을 묶는 편이 수출 경쟁력과 사업 효율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 'AI 시대' 항공기 사업 재편…수출 패키지·지역 생태계 확장
항공기 사업에서도 통합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KAI의 주력인 항공기 사업은 막대한 고정비가 필요한 구조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출 물량을 꾸준히 확보하지 못하면 수익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KAI는 T-50 훈련기와 FA-50 경공격기를 앞세워 동남아, 중동, 유럽 등으로 수출 시장을 넓혀 왔지만 당초 기대했던 글로벌 시장 점유율과는 아직 격차가 있다.
최근 해외 고객의 요구도 달라지고 있다. 중동을 포함한 주요 수입국은 기체만 사들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엔진, 항전장비, 무장체계, 후속지원, 핵심 기술 이전, 공동개발 조건을 함께 요구하고 있다. 항공기 성능만큼 원가, 납기, 공급망 관리, 정비·수리·분해조립(MRO), 기술 협상력이 수주 경쟁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셈이다.
한화와 KAI의 협력 확대는 이 같은 수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공동 의사결정과 전략 수립이 가능해지면 해외 수출을 위한 공동 마케팅과 패키지 제안도 한층 정교해질 수 있다. 특히 항공엔진은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수출 협상에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갖는 핵심 요소다. 차세대 첨단 항공엔진을 개발 중인 한화가 KAI의 완제기 역량과 결합하면 해외 기술 의존도를 낮추고 독자적인 수출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AI 기반 자율체계 시대에는 기체, 엔진, 항전장비를 따로 개발하는 방식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체계 통합과 최적화 능력이 수출 성패를 가르는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가 방산과 우주 분야에서 쌓아 온 선제 투자 경험, 미래 성장동력 발굴 역량, 해외 수출 노하우가 KAI의 항공기 개발·제작 역량과 맞물리면 한국형 우주·항공 수출 모델의 외연도 넓어질 수 있다.
지역 산업 측면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창원, KAI는 사천에 주요 사업장을 두고 있다. 두 회사는 경남을 대표하는 우주·항공·방산 기업이다. 한화와 KAI의 협력 확대는 경남 창원과 사천,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고흥을 잇는 남부지방 우주·항공 종합벨트의 핵심 축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벨트가 본격화되면 지역 균형발전 효과도 기대된다. 우주·항공·방산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협력업체와의 상생 생태계가 강화되고, 고급 기술 인력 중심의 일자리 창출도 이어질 수 있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육성,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협력업체의 해외 동반 진출 역시 양사 협력의 파급 효과로 거론된다.
한화 관계자는 “KAI와의 협력은 특정 기업의 지분 확대를 넘어 대한민국 우주·항공 산업의 규모와 속도를 키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며 “주주와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국가 안보와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협력 방안을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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