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 IBK기업은행 본점에 자리한 기업은행 역사관은 일반적인 금융회사 전시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역대 행장이나 경영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대한민국 경제발전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걸어온 길 그리고 그 곁을 지켜온 기업은행의 역할을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역사관은 대한민국 경제사와 중소기업 발전사, 기업은행의 역사를 하나의 시간축 위에 배치했다. 산업화 초기 자금난에 시달리던 중소기업부터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오늘날 혁신기업과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기업은행이 어떤 방식으로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역사관은 은행의 성장사를 보여주기보다 '왜 기업은행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는 역사관 곳곳에 담긴 전시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관 관계자는 "은행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발전 과정에서 기업은행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라며 "과거 60여 년이 중소기업 발전을 지원한 역사였다면 앞으로는 중소기업 발전을 이끄는 역사로 나아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헌법에 새겨진 사명
역사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123조와 중소기업은행법이다. 정면 벽에는 헌법 제123조 제3항인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는 기업은행이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국가의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수행하는 정책금융기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역사관 관계자는 "기업은행은 1961년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라 설립됐으며, 이후 헌법 제123조에 중소기업 보호·육성 의무가 명문화되면서 그 역할과 가치가 헌법적 의미를 갖게 됐다"며 "중소기업 지원을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하고 이를 전담해 온 대표적인 정책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기업은행은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라 1961년 설립됐다. 당시 자본금은 2억원, 직원은 935명, 전국 31개 영업점 규모였다. 산업 기반이 취약했던 시기 중소기업은 자금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정부는 중소기업 육성을 국가 경제 발전의 핵심 과제로 삼아 전담 금융기관 설립에 나섰다.
역사관 내부에는 당시 전화교환기와 연차보고서, 차관 관련 자료, 중소기업 지도 및 경영컨설팅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기업은행이 처음부터 단순한 대출기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창립 당시 조직도에는 현재 IBK경제연구소의 전신인 '조사부'가 포함돼 있다. 기업은행은 금융 지원뿐 아니라 산업 조사와 연구, 기업 분석, 경영 컨설팅 기능을 함께 수행하며 중소기업 정책 싱크탱크 역할도 맡았다.
관계자는 "기업이 성장하려면 자금뿐 아니라 정보와 전략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설립 초기부터 조사·연구 기능을 함께 운영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 IMF·금융위기 때 더 빛난 '우산론'..."비 오는 날 우산을 빼앗지 않는다"
역사관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기업은행 역사를 관통하는 철학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우산론'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빼앗지 않는다'는 이 문장은 기업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금융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는 기업은행의 경영 철학을 상징한다.
실제 기업은행은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 등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을 확대해 왔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많은 금융기관이 부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출을 회수하거나 공급을 축소했지만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자금 공급을 유지하며 위기 극복을 지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역할을 확대했다.
이번 역사관 조성을 주도한 서경란 IBK경제연구소 소장은 기업은행의 역할을 '경기 대응 기능'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서 소장은 "중소기업 대출 공급 추이를 보면 경기 침체기에는 시중은행의 대출 공급이 줄어드는 반면 기업은행은 오히려 공급을 확대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며 "반대로 경기가 좋을 때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면 기업은행은 무리하게 경쟁하기보다 건전성 관리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평상시에는 시장성과 공공성의 균형을 맞추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공공성의 역할이 훨씬 커지는 것이 기업은행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역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 중소기업 금융의 핵심 축인 신용보증기금의 출발점 역시 기업은행이었다. 신용보증기금은 기업은행 내부 조직으로 운영되다가 1970년대 별도 기관으로 독립했다.
이후 신용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보증을 제공하고 기업은행이 자금을 공급하는 한국형 중소기업 금융 체계가 구축됐다. 기업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이 오늘날까지 중소기업 금융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 네트워크론에서 IBK창공까지...중소기업 성장의 생태계 만들다
역사관 후반부로 갈수록 기업은행의 역할은 단순한 자금 공급 기관에서 중소기업 성장 파트너로 확장된다. 대표 사례가 '네트워크론'이다. 대기업과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 중소기업에 금융을 지원하는 제도로, 개별 기업이 아닌 산업 생태계 전체의 동반성장을 지원한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며 산업 발전을 이끈 중소기업인을 조명해 왔고 최근에는 창업육성 플랫폼 'IBK창공'을 통해 교육과 멘토링, 투자 연계까지 지원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은행을 넘어 기업의 탄생과 성장, 혁신과 도전을 함께 지원하는 금융기관으로 역할을 넓혀온 것이다.
역사관에는 ESG 금융과 공공 마이데이터 사업, 디지털 금융 혁신 사례도 함께 소개돼 있다. 산업화 시대 제조업 중심의 금융 지원에서 출발한 기업은행이 디지털 전환과 혁신기업 육성까지 역할을 확장해 온 과정을 보여준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독일과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은행은 1965년 독일 차관 자금을 도입하여 기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지금 역사관에는 기업은행이 독일 대표 은행인 코메르츠방크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내용도 소개돼 있다. 과거 산업화 자금을 지원받던 위치에서 이제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협력 파트너로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역사관 관계자는 "이제는 독일 대표 은행과 협력 관계를 맺을 정도로 성장했다"며 이는 "기업은행과 대한민국 중소기업이 함께 걸어온 성장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서경란 소장은 "기업은행은 65년 동안 중소기업의 탄생과 성장, 위기 극복 과정을 함께해 왔다"며 "기업은행의 역사는 결국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중소기업을 받쳐주는 역할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혁신기업과 중소기업의 성장을 이끄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며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내일을 키우는 것이 기업은행의 변하지 않는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폴리뉴스 권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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