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를 향한 국민적 불신이 커지면서 반대 급부로 철저한 선거관리 시스템을 갖춘 선진국 사례에도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의 국가들은 선거 관리를 단순한 행정 업무 영역을 넘어 국민의 참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국가 핵심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무결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선거 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개선책을 넘어 선진국처럼 관리 주체의 책임을 엄격히 강화하고 시스템 전반을 투명하게 재설계하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자개표기 배제로 정확성 인정받은 독일…명확한 책임 소재로 공정성 강조한 영국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거 관리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손꼽히는 국가다. 독일 선거 관리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기관이나 일부 전문가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유권자가 선거 과정을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2009년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가 전자개표기 사용을 금지한 조치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전자개표기의 조작 여부를 떠나 기계 내부의 집계 과정이 유권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연방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독일의 개표는 투표 종료 직후 각 투표소 현장에서 즉시 개시되며 절차 전반은 시민에게 공개된다. 선거 관리 인력이 투표함 봉인 상태를 확인한 뒤 투표지를 한 장씩 직접 꺼내 육안으로 후보자나 정당명을 확인하고 이를 소리 내어 읽으며 집계표에 기록하는 수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독일은 개표 과정에서 정당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언론의 참관 또한 자유롭게 보장하고 있다.
개표 결과 검증 체계 역시 다단계 교차 검증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각 투표소에서 집계된 결과는 지방 및 주 선거관리기관을 거쳐 연방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투표자 수와 투표지 수의 일치 여부, 무효표 처리의 적정성 등을 반복적으로 점검하는 체계가 마련돼 있다. 또한 선거 이후 정당이나 후보자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재검표를 포함한 사법적 심사 절차를 보장함으로써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선거 관리 체계에 대한 현지 유권자들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지난해 독일 정치학자 크리스티안 슈나우트(Christian Schnaudt)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일 유권자의 약 80%가 현지 선거 관리 시스템의 무결성을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아울러 독일은 선거 관리 체계의 독립성 또한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 최고 선거 책임자인 연방선거관리관(Bundeswahlleiter)을 연방통계청장이 겸임한다. 정당 소속 정치인이나 선출직 공직자가 아닌 행정·통계 분야 전문가에게 선거 사무를 총괄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연방선거관리관은 법률에 근거해 투·개표 과정의 엄정한 집행을 감독하며 정부나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지위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독일이 개표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면 영국은 선거 관리 과정에서의 책임성과 지역별 현장 운영의 정확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국은 중앙정부가 선거를 직접 통제하는 동시에 각 지방정부가 선거 실무를 운영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선거마다 지역별 선거관리책임자(Returning Officer)가 지정되며 투표소 운영 부실이나 개표 과정의 문제, 유권자 명부 관리 오류 등이 발생할 경우 해당 지역 선거관리책임자가 직접 법적 책임을 진다. 선거 관리의 실패를 조직 전체의 문제로 희석시키기보다 책임자를 명확히 함으로써 선거 자체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식이다.
영국 역시 모든 개표는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개표 사무원이 투표지를 직접 확인하고 집계한다. 개표 과정은 후보자와 정당 관계자, 참관인, 언론 등이 근거리에서 참관할 수 있으며 이의가 제기될 경우 즉시 투표지를 재확인하는 절차가 이뤄진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개표 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현장에서 즉각적인 재검표가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후보자나 유권자가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법원에 선거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법원은 중대한 위법 사항이 확인될 경우 선거 무효나 재선거를 명령할 권한을 갖는다. 지난 2024년 영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가 투표 과정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73%는 영국의 선거가 전반적으로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치 개입 차단 시스템 구축한 캐나다…대국민 공개 개표 도입한 대만
캐나다도 선거 관리 운영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 국가 중 한 곳이다. 캐나다 선거 제도의 특징은 선거 관리 체계를 정치권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운영한다는 점이다. 캐나다 연방 선거는 의회 산하 독립기구인 선거관리청이 총괄하기 때문에 행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선거 관리 최고 책임자인 최고선거관리관(Chief Electoral Officer)은 정권과 무관하게 임기를 보장받는다. 내각이 임의로 교체할 수 없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선거 사무 전반에 걸친 정치적 중립성을 엄격하게 담보한다는 취지다. 특히 최고선거관리관은 정당 활동과 정치적 의사 표현에 있어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까지 특정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 참여가 금지된다.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도 정치권의 영향력을 최소화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 정당 간 이해관계에 따라 자국에 유리한 선거구를 획정하려는 이른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달리 캐나다는 '선거구획정위원회'라는 별도의 독립 기구를 두고 있다. 해당 위원회 구성원은는 판사와 관련 분야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되며 현직 정치인의 개입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유권자 명부 관리 또한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캐나다는 '국가선거인등록부(National Register of Electors)'를 운영하며 세금 신고 자료, 운전면허 정보, 인구통계 자료 등을 상시 대조하여 선거인 명부를 매년 갱신한다. 사망자, 중복 등록자, 주소 이전자를 정비함으로써 선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행정적 오류를 최소화하고 있다. 개표 과정은 종이투표와 수개표 원칙을 고수한다. 투표 종료 후 선거관리요원이 투표지를 직접 확인·집계하며 각 후보 측 참관인 역시 이를 지켜볼 수 있다.
캐나다 선거 시스템의 또 다른 특징은 선거 종료 이후에도 지속적인 검증 절차를 거친다는 점이다. 투표자 수와 투표지 수의 일치 여부, 개표 결과 등을 수차례 반복 점검하며 필요시 법원의 판단에 따라 재검표를 진행한다. 이러한 구조는 높은 국민적 신뢰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 선거관리청이 발표한 전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1%가 선거관리청의 선거 운영을 공정하다고 평가했다. 같은 기간 캐나다 연방정부에 대한 신뢰도(49%)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우리나라와 인접한 대만 역시 아시아의 모범 선거 국가로 꼽히고 있다. 대만 선거의 특징은 개표 절차 전체를 유권자에게 공개한다는 점이다. 투표가 종료되면 투표함은 외부로 이송되지 않으며 투표 현장에서 즉시 개표가 진행된다. 선거 관리 요원은 시민과 참관인, 언론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함을 개봉하고 투표지를 한 장씩 확인한다. 이때 개표 요원이 투표지를 들어 올려 후보를 큰 소리로 낭독하면 다른 요원이 이를 집계표에 기록한다. 독일과 흡사한 방식이다. 이러한 현장 중심의 개표 방식 덕분에 현지에서는 선거가 하나의 시민 참여 행사로 인식되고 있다.
선거 결과 사후 검증 절차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다. 후보자나 이해관계인은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법원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재검표를 명령할 수 있다. 실제로 2004년 총통 선거에선 약 3만표 차이로 승패가 갈리자 선거 불복 소송이 제기됐고 그 과정에서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단위 재검표가 실시됐다. 재검표 결과 득표수는 일부 조정됐지만 최종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만의 선거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역시 비교적 높은 편이다. 대만은 2000년 이후 여러 차례 정권 교체를 경험했음에도 선거 결과가 제도권 안에서 수용되며 민주주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돼 왔다. 대만 국립정치대학(NCCU) 선거연구센터와 대만민주화재단 등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만 국민의 약 70%가 자국 민주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대만 학계에서는 이러한 시민참여형 형태가 선거 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유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노중기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 선거 시스템을 향한 국민적 불신은 단순히 기술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선거 관리의 전 과정이 시민의 눈앞에서 직접 검증 가능한지, 혹은 관리 주체가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것에서 기인한다"며 "해외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선거 관리 인프라를 구축하고 운영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이를 우리 현실에 맞게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르데스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