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미국이 최상위 인공지능 모델의 외국인 접근을 막으면서 한국의 인공지능 전환 전략도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그동안 반도체와 첨단 장비에 집중됐던 수출 통제가 인공지능 모델 자체로 확대되면서, 해외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앤트로픽의 ‘페이블5’와 ‘미토스5’를 사실상 수출 통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아마존 연구진이 페이블5에서 사이버 공격에 악용될 수 있는 정보를 끌어냈다는 우려를 당국에 전달한 뒤 백악관 논의를 거쳐 외국 정부와 기업, 개인의 접속을 차단했다.
미국 내 외국인까지 제한 대상에 포함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자국에서 외국인 연구원에게 기술을 보여주는 것까지 수출로 보는 방산·반도체 분야의 ‘간주 수출’과 비슷한 방식이다. 국적을 구분해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웠던 앤트로픽은 출시 사흘 만에 전체 이용자의 접속을 중단했다.
이번 결정은 미국이 인공지능 모델 자체를 전략물자처럼 관리할 수 있다는 선례로 해석된다. 한국 기업이 비용을 지불하고 정상적으로 계약했더라도 미국 정부 판단에 따라 핵심 도구가 하루아침에 끊길 수 있다는 의미다. 외산 제품을 연구개발과 고객 서비스에 깊이 연결할수록 사업 중단 위험도 함께 커지는 구조다.
인공지능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앤트로픽은 같은 기반 기술을 일반용 페이블5와 보안 특화형 미토스5로 나눴다. 민감한 질문을 제한한 일반 제품과 달리 미토스5는 검증된 기관만 참여하는 ‘프로젝트 글래스윙’을 통해 제공하도록 설계했다. 성능뿐 아니라 보안 능력과 계약 관계가 이용 자격을 좌우하는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글래스윙 참여 기관들이 수주 만에 심각도 ‘높음’ 이상인 취약점 1만건 이상을 찾았다는 점은 최첨단 모델의 가치와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전담 조직이나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한 회사는 이런 도구를 사용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소득과 학력에 따라 벌어지던 인공지능 격차가 기업과 국가의 보안 수준에 따른 격차로 확대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국내 산업계도 방어 체계를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SDS는 미국 보안 스타트업 엑스보우와 손잡고 인공지능 기반 모의해킹과 취약점 탐지 역량을 강화한다. 테이텀 시큐리티와는 아마존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에 흩어진 자산을 한 화면에서 살피는 통합 관제 체계를 구축한다.
예방과 감시에 그치지 않고 사고 원인 분석과 복구, 재발 방지까지 잇는 관리형 보안 서비스도 확대한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여러 클라우드를 함께 사용하는 기업이 늘면서 기존의 경계 중심 방어만으로는 공격 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운영할 능력이 도입 속도와 사업 연속성을 좌우하는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활용 범위가 커질수록 통제 장치의 중요성도 높아진다. 삼성은 전 관계사에 제미나이와 챗지피티, 클로드 등 외부 생성형 서비스를 공식 도입하고 개발·제조·물류·마케팅 등 8대 업무를 재설계할 방침이다. 동시에 전담조직 신설과 사장단·임직원 교육, 권한 관리, 보안 정책 수립을 병행한다. 사용을 막기보다 허용하되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만 기술적 차단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진석 동국대 교수는 시스템 개발 초기부터 안전과 책임, 사회적 영향을 구조 안에 넣는 ‘윤리가 내재된 사이버보안’을 제안했다. 사고가 발생한 뒤 지침을 덧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설계 단계부터 오남용 방지 장치와 책임 주체를 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정부는 국제 규칙 설계에도 나서고 있다. 한국이 국제전기통신연합 정보보호연구반 회의에서 제안한 신규 표준화 항목 14건이 승인됐고, 7건은 국제표준으로 사전 채택됐다. 멀티모달 인공지능과 피지컬 인공지능, 에이전트 신원관리, 소프트웨어 공급망 등 앞으로 산업 현장에서 중요해질 분야가 포함됐다.
해외 기준을 받아들이는 데 머물지 않고 국내 기술과 운영 경험을 세계 규범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외산 모델의 공급 여부를 통제할 수는 없더라도, 안전 기준을 선점하고 대체 기술을 확보하면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 역시 단순한 국산화보다 공공·안보·산업 영역의 최소 자립성을 확보하는 장치로 볼 필요가 있다.
AI 업계 한 관계자는 “최상위 모델은 이제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기반시설”이라며 “외산 서비스를 활용하더라도 공급 중단에 대비한 대체 수단과 보안 인력, 책임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국내 원천 기술과 국제표준 영향력을 동시에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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