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발발 3개월·미·이란 예비 평화합의 발표 D+1. 세계 경제는 아직 침체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충격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석유 비축분 방출과 수요 둔화,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 미국과 아시아의 인공지능(AI) 투자가 충격을 흡수했지만, 그 비용은 에너지 수입국과 저소득국, 전쟁 인접국에 집중되고 있다.
▲비축유 방출과 수요 감소로 버틴 유가
국제통화기금(IMF)은 15일(현지시간)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강한 회복력을 보이고 있지만 국가와 지역에 따라 경제적 피해가 크게 갈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중국에서는 성장세가 유지되고 금융시장도 비교적 안정됐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거나 재정 여력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물가 상승과 통화가치 하락, 자본 유출, 성장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번 전쟁이 세계 경제에 미친 첫 번째 충격은 에너지 가격이다. 국제유가는 전쟁 이전보다 약 30% 높은 수준이다. 다만 전쟁 초기의 급등세에서는 내려왔다. 중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가 비축 원유를 방출했고, 아시아에서 높은 가격으로 수요가 줄어든 것이 유가 상승을 억제했다. 걸프 지역의 원유 생산과 정유시설 가동 확대도 공급 감소분을 일부 보완했다.
이는 공급이 정상화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존 재고를 소진하고 소비를 줄여 충격을 버티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비축유에는 한계가 있고 수요 억제는 소비와 생산의 감소로 이어진다. 현재의 안정은 공급 확대를 통한 회복이라기보다 재고와 소비를 희생해 시간을 번 결과다.
▲유가 충격, 성장보다 물가에 먼저 나타나
에너지 가격 상승은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IMF가 지난 2월 이후 각국의 연간 물가 상승률 변화를 비교한 결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미국에서 상승 폭이 가장 컸다. 유로존과 스페인, 튀르키예,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물가 상승 압력이 뚜렷했다.
유가 상승은 운송비와 전력비, 생산비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 가격으로 확산한다. 비료와 식품 가격까지 오르면 저소득층이 체감하는 생활비 부담은 공식 물가 상승률보다 커진다. 에너지 지출의 소득 대비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물가 상승이 임금과 가격의 연쇄 인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중기 인플레이션 기대가 대체로 안정돼 있고,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우선할 것이라는 신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신뢰가 에너지 충격이 지속적인 고물가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 것이다.
금융시장도 전쟁 충격에 비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쟁 이후 국채 금리는 크게 올랐지만 위험자산 가격은 기업 실적을 바탕으로 상승했다. 달러와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자금이 일시에 몰리는 광범위한 위험회피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역사적 기준으로 보면 세계 금융여건은 여전히 완화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시장 안정과 실물경제의 안정은 같은 뜻이 아니다. 국채 금리 상승은 정부와 기업의 차입 비용을 높인다. 외화부채가 많거나 경상수지가 취약한 국가는 환율 하락과 자금 유출까지 겹칠 수 있다. 금융시장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전쟁의 경제적 비용이 작다고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AI 투자가 전쟁 충격 막았지만 격차도 키웠다
세계 경제가 버틴 또 다른 이유는 AI와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기술 투자다. 미국에서는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망 투자가 성장을 떠받쳤다. 아시아 일부 국가도 반도체와 서버, 전자부품 수출 증가의 혜택을 받았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소비와 전통 제조업을 압박하는 동안 AI 투자가 설비투자와 수출을 끌어올린 것이다. 세계 경제 전체로 보면 기술 투자가 전쟁으로 발생한 수요 감소를 일부 상쇄했다.
문제는 이 혜택이 소수 국가와 기업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를 공급할 능력이 있는 국가는 투자와 수출이 늘지만, 에너지를 수입하면서 기술 생산 기반이 약한 국가는 비용만 부담한다. 같은 전쟁 충격을 받더라도 기술 공급국에는 투자 기회가 되고 기술 수입국에는 생산비 상승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한국은 이 두 흐름이 교차하는 위치에 있다. 원유와 천연가스를 해외에 의존하는 에너지 수입국인 동시에 AI 반도체와 메모리, 전력기기, 조선·해운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술·제조업 수출국이다. 에너지 수입액 증가는 교역조건과 국내 물가에 부담을 주지만, AI 설비투자 확대는 반도체와 전력 인프라 수출을 늘릴 수 있다. 한국 경제의 성패는 유가 자체보다 수입 비용 증가를 기술 수출과 생산성 향상으로 얼마나 상쇄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 비용은 약소국에 집중
전쟁과 가까운 걸프 지역 산유국은 생산시설과 기반시설 피해로 성장률 전망이 급격히 낮아졌다. IMF가 조사한 전쟁 영향권 8개국 가운데 5개국은 경제가 전년보다 축소될 것으로 예상됐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2026∼2027년 누적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은 지난 1월과 비교해 약 2%포인트 하향 조정됐다. 에너지 수입 비중이 높은 저소득 개발도상국도 약 0.5%포인트 낮아졌다. 반면 전쟁 지역 밖의 일부 에너지 수출 신흥국은 유가 상승으로 성장률 전망이 높아졌다.
유럽의 에너지 수입국에서는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생산비와 생활비를 높이는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경기 둔화를 감수하더라도 인플레이션 기대가 다시 높아지는 것을 막겠다는 판단이다.
아시아 신흥국은 국제유가 상승뿐 아니라 환율과 자본시장을 통해 충격을 받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소매 휘발유 가격이 전쟁 이전보다 40% 상승했다. 국채 금리 상승과 통화가치 하락, 자본 유출이 수입 비용을 다시 끌어올리면서 에너지 충격이 금융 충격으로 증폭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피해는 더욱 직접적이다. 에티오피아와 말라위, 잠비아 등에서는 연료 부족이 나타났고 여러 국가에서 휘발유 가격이 급등했다. 르완다와 탄자니아에서는 전쟁 이후 휘발유 가격이 약 50%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비료와 식품 가격까지 밀어 올리면서 식량 불안 위험도 커지고 있다.
같은 유가 상승도 선진국에서는 소비 둔화로 끝날 수 있지만 저소득국에서는 외화 부족과 재정 악화, 연료 공급 중단으로 이어진다. 이번 충격의 크기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뿐 아니라 외화 유동성과 재정 여력, 금융시장 접근성이다.
▲가격 억누르기보다 취약계층 선별 지원해야
IMF는 각국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 의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일시적이더라도 인플레이션 기대가 흔들리면 임금과 서비스 가격으로 확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는 국가에서는 추가 긴축이 필요할 수 있다.
재정정책은 가격상한제나 포괄적 에너지 보조금보다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 직접 지원을 중심으로 설계해야 한다. 가격상한제와 보편적 보조금은 에너지 절약과 공급 확대를 유도하는 가격신호를 훼손하고 재정 부담을 키운다. 지원 대상을 저소득층과 피해 업종으로 한정하고, 지원 기간을 명확히 정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AI 투자에 따른 성장의 성과를 확산하려면 재정 여력을 단기 보조금에 소진해서도 안 된다. 전쟁 충격에 대응하는 사회안전망과 함께 전력망, 디지털 기반시설, 기술 인력과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를 유지해야 한다. 에너지 충격으로 재정이 약해진 국가가 기술 투자에서도 뒤처지면 현재의 물가 격차가 장기적인 생산성 격차로 굳어질 수 있다.
IMF는 잠비아의 기존 자금지원 확대와 기간 연장 요청을 검토하고 있으며,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외부자금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지원 확대에 실무진 차원의 합의를 이뤘다. 에티오피아에는 자금 집행 시기를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말라위와 신규 프로그램 협의를 시작했다. 방글라데시도 새로운 지원을 요청했다.
세계 경제는 전쟁 충격을 견뎠지만 충격을 제거한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비축유와 중앙은행 신뢰, 미국과 아시아의 AI 투자가 세계 성장률을 방어하는 사이 재정과 외화가 부족한 국가에 비용이 쌓이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의 봉쇄가 장기화하거나 중동 기반시설 피해가 확대되면 현재의 완충장치는 빠르게 약해질 수 있다. IMF는 다음 달 8일 세계경제전망 수정치를 통해 전쟁이 성장과 물가에 미친 영향을 다시 제시할 예정이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세계 경제가 지금까지 전쟁 충격을 견뎌낸 것은 안도할 일이지만, 안일함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IMF는 피해를 입은 회원국들과 함께 충격을 관리하고 취약계층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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