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외국 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에 학위 수여 권한이 없거나 이른바 학위 공장으로 논란이 됐던 기관들이 다수 등록돼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학위 신고 서류가 실제로는 교수 임용과 연구기관 채용 과정에서 사실상 인증 자료처럼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한국연구재단의 외국 박사학위 신고 제도를 통해 학위 취득 사실을 등록할 수 있다. 제도 취지는 해외 박사학위 취득자 현황을 파악하고 학위 논문을 학술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쉽게 말해 국가가 해외 박사학위 취득 현황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데이터베이스(DB)인 셈이다.
못 거른다
외국 박사학위 신고제는 말 그대로 ‘신고’제도다. 해당 학위를 공식 인증하거나 보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소 다르다. 실제로는 학위 신고 사실이 교수 임용이나 연구기관 취업 과정에서 사실상 필수 서류처럼 요구된다.
대학 교수 채용이나 연구기관 채용 과정에서는 외국 박사학위 신고 서류를 제출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해외 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 역시 신고 사실을 자신의 학력을 입증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활용한다. 결국 신고 서류일 뿐인데 실제로는 학위 확인 자료처럼 사용되는 셈이다.
문제는 외국 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에 등록된 기관들 가운데 일부가 학위 공장 논란 기관이거나 학위 수여 권한이 없는 기관이라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 외국 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에 등록된 해외 기관 2145곳 중 최소 31곳은 현지 법령상 학위 수여 권한이 없거나, 학위 공장 논란이 있었던 기관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문제의 기관들 중 미국의 일부 교육기관은 과거 현지 정부 조사 과정에서 돈만 내면 학위를 발급하는 이른바 ‘학위 공장’으로 지목된 바 있다.
학위 공장은 정규교육과 연구 과정보다 학위 판매 자체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과거 연방정부와 회계감사원(GAO) 등이 학위 공장 문제를 여러 차례 지적하며 관련 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대학이 아닌 기관도 확인됐다. 독일의 한 연구기관은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연구소지만 독자적인 학위 수여 권한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한 기관은 대학이 아닌 학술단체로 확인됐다. 영국의 한 교육기관 역시 직업교육과 평생교육 중심 기관으로, 정식 박사학위를 단독 수여할 권한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 기관들이 등록기관 명단에 포함된 배경에는 기관을 등록하는 방식이 있다. 한국연구재단 안내에 따르면 외국 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국외 기관의 경우 신청자가 직접 기관 등록을 요청할 수 있다.
신청자는 기관명과 국가, 홈페이지 주소(URL) 등의 정보를 입력해 등록을 신청하면 된다. 실제로 시스템 안내문에는 “학위 수여 대학이 검색되지 않을 경우, 국외 기관 등록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있다. 국외 기관의 경우 기관 담당자가 아닌 개인도 직접 신청할 수 있도록 돼있다.
교수 임용에 쓰이는데…학위공장까지 등록
등록 기관 2145곳 중 문제 기관 최소 31곳
문제는 이 같은 방식으로 등록된 기관들이 이후 별다른 정비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등록된 기관은 폐교나 인가 취소, 학위 수여 권한 상실 등 중대한 변동 사항이 발생하더라도 삭제되거나 수정되지 않은 채 계속 명단에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현지 교육 당국으로부터 인가가 취소된 기관과 이미 운영이 종료된 기관, 나아가 실체 자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기관들까지 등록 기관 명단에서 확인됐다. 일부는 과거 학위 공장 논란으로 폐쇄됐음에도 여전히 등록 기관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게다가 현지에서는 정식 학위 수여 기관으로 보기 어려운 사설 교육기관이 국내 대학과 공동학위 또는 연계 과정을 운영하면서 해당 학위가 국내에서는 외국 박사학위로 활용되는 사례도 확인됐다.
일례로, 스위스의 경우 석·박사학위 수여 권한은 연방 또는 주(칸톤) 정부의 인가를 받은 고등교육기관에 부여된다. 스위스 정부가 운영하는 공식 고등교육기관 목록에는 국가가 인정하는 대학들이 등재돼있으며, 해당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기관은 원칙적으로 정식 대학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런데 취재 결과 국내 A 대학이 공동학위 과정을 운영한 스위스 소재 B 기관은 해당 공식 목록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B 기관과 연계한 EMBA 및 석·박사 과정은 국내에서 운영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경우도 국가가 인정하는 학위와 교육기관 자체가 운영하는 교육 과정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일정한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기관은 국가 공인 학위를 수여할 수 없으며, 교육기관의 법적 지위에 따라 운영 가능한 과정도 제한된다.
그런데 국내에서 운영 중인 C 교육기관의 경우 프랑스 교육기관과 연계한 교육 과정을 운영하면서 홈페이지에 학위 과정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해당 기관은 프랑스 교육법상 정식 학위 수여 기관이 아닌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현지 공식 인정 대학 목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기관의 학위를 취득한 교원 사례도 확인됐다. D 대학 소속 한 교수의 공개 프로필에는 스위스 소재 교육기관에서 취득한 학위가 기재돼있었지만, 해당 기관은 스위스 정부 공식 인정 대학 목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위 수여 권한 없는 기관도 명단에 포함
교수 임용·연구기관 채용서 확인 자료로
이 같은 해외 학위 문제가 사회적 논란으로 번진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7년 발생한 이른바 ‘신정아 사태’다. 당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신씨는 미국 예일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 교수와 미술관 고위직에 임용됐다.
그러나 학위 진위 여부를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논란은 한 대학이 신씨의 학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언론 보도와 대학 측 검증이 이어졌고, 예일대학교가 직접 “신씨는 해당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신씨의 학력은 허위로 드러났고, 교수 임용 과정과 학력 검증 절차 전반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국내 대학들이 해외 명문대 학위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검증 없이 교수 임용을 진행했다는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교육 당국은 해외 학위 검증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고, 대학가 역시 교원 임용 과정에서 학력 검증을 보다 엄격하게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신정아 사태 이후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해외 학위를 둘러싼 논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허위 학위와 위조 학위 문제는 물론, 해외에서의 법적 지위가 불분명한 교육기관이나 학위 과정이 국내에서는 별다른 검증 없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현행 외국 박사학위 신고제도는 해외 학위 취득 현황을 관리하기 위한 것일 뿐, 학위의 적법성이나 학위 수여 기관의 법적 지위를 국가가 직접 인증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대학 교원 임용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 채용 과정에서는 외국 박사학위 신고 내역이 사실상 학위 확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결국 해외 학위의 진위와 적법성을 검증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있으나 마나
전문가들은 해외 학위의 인정 여부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학위 수여 기관의 인가 여부와 학위의 법적 지위, 폐교·인가 취소 여부 등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체계는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해외 학위가 교수 임용과 연구기관 채용 등 공적 영역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는 만큼, 보다 실효성 있는 검증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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