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로 야생식물의 서식지가 빠르게 위협받는 지금, 사라질 위기의 식물 개체와 종자를 함께 보전하며 미래 생태계와 식량·의약 자원을 지키는 공간이 주목되고 있다.
경북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하 수목원) 알파인하우스의 문이 열리면 서늘한 고산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초여름 기온과 완벽히 차단된 냉기 어린 공간 속에 누군가는 평생을 살아가며 단 한 번도 볼 수 없을 식물들이 보존돼 있다.
외부보다 몇 도 낮은 온도로 유지되고 있는 알파인하우스 내부 환경은 고산지대를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다. 공기 중에는 안개처럼 미세한 물방울이 분사되고 있었고 지면 아래에는 차가운 지하수가 순환하며 토양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알파인하우스는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고산·아고산 식물들을 보전하기 위한 ‘식물 피난처’였다.
알파인하우스는 동북아시아전시관, 중앙아시아전시관, 세계식물전시관 등 3개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높은 산악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외부보다 낮은 온도를 유지하며 환풍시설과 차광시설, 냉각 시스템을 24시간 운영한다.
동북아시아전시관 내부 곳곳에는 설악산과 한라산, 지리산 정상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설악산 특산식물인 산솜다리와 금강봄맞이, 한라장구채, 애기솜다리, 만병초류 등이 대표적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잘 알려진 구상나무도 이곳에서 보전되고 있었다.
구상나무는 기후변화가 식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라산과 지리산 등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지만 최근 집단 고사가 진행되면서 멸종위기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최대한 생태계와 유사한 환경으로 보존된 탓에 외부 동식물이 유입돼 식물들과 공존하기도 했다. 지하수로 이뤄진 인공호수가 조성돼 있는 중앙아시아전시관 현장에서는 건강한 참개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목원 서비스본부 전시원실 장창석 실장은 “평상시 뱀, 쥐, 고양이 등이 알파인하우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알파인하우스는 단순 전시시설이 아닌 ‘현지외 보전(ex-situ conservation)’ 시설로 운영된다. 연구진은 자생지에서 종자를 확보하고 증식 과정을 거쳐 개체를 키운 뒤 전시와 연구, 교육에 활용한다.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식물을 살아 있는 상태로 보전하는 것이다.
식물들이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진은 알파인하우스 구성을 위해 설악산과 지리산, 한라산뿐 아니라 몽골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고산지대까지 직접 탐사에 나서 왔다.
수목원 장 실장은 “해발 3000~5000m 지역에 캠프를 설치하고 수주간 현장 조사를 진행하며 종자와 식물체를 수집했다”며 “현장에서 확보한 식물들은 법적 절차를 거쳐 국내로 반입된 뒤 증식과 적응 과정을 거친다. 이후 알파인하우스에서 관리되며 연구자료와 보전 자원으로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기후변화가 이미 식물 생태계의 변화를 현실로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희귀식물의 절반 이상을 보전하고 있는 수목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수목원은 아시아 최대, 세계 두 번째 규모로, 전체 면적은 5179ha(약 1500만 평)에 달하며 39개 전시원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국내 전체 식물 3925종 가운데 1723종(43.9%)을 보유하고 있으며 희귀식물은 571종 중 327종(57.2%), 특산식물은 360종 중 166종(46.1%)을 확보하고 있다.
살아 있는 식물을 보전하는 공간이 알파인하우스라면, 씨앗인 상태로 장기간 종자를 저장해 두는 공간은 수목원의 또 다른 대표적 상징인 ‘시드볼트(Seed Vault)’다.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는 세계 최초의 야생식물 종자 전용 시드볼트로, 지하 40m 이상 깊이에 조성된 시설 내부는 영하 20도, 상대습도 40% 수준으로 유지된다. 재난과 정전, 지진 등에 대비한 설계가 적용돼 있으며 국가 중요시설로 관리된다. 평소 일반인 출입은 물론 사진 촬영도 엄격히 제한된다.
시드볼트는 전쟁이나 대형 산불, 기후재난 등으로 특정 식물이 야생에서 사라질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안전장치라고 설명 가능하다. 실제 노르웨이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는 시리아 내전 당시 종자은행이 파괴되면서 보관 중이던 종자를 반출해 종자 복원에 활용한 사례가 있다.
수목원 측은 “시드볼트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시드볼트가 개방된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이미 재난이 발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난이란 점점 심각해지는 생물다양성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세계자연기금(WWF)의 ‘2024 지구생명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20년까지 전 세계 야생 척추동물 개체군의 평균 규모는 73% 감소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역시 같은 기간 평균 60% 줄었다. 영국 왕립식물원 큐(Kew Gardens)가 2023년 발표한 보고서는 전 세계 현화식물의 약 45%가 멸종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식량 위기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바나나의 경우 현재 재배 품종이 병해에 취약해지면서 야생 기원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과 재배지도 기후변화에 따라 점차 북상하고 있다. 과거 대구가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 불렸다면 이제는 강원 일부 지역에서도 사과 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심각하게 전개될 경우 2090년대에는 국내 사과 재배 적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수목원 야생식물종자연구실 나채선 실장은 “기후변화와 서식지 파괴로 야생식물이 사라질 경우 생태계의 균형뿐 아니라 식량과 의약, 산업 자원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서 “모든 작물의 출발점은 결국 야생식물이다. 현재 재배되는 작물도 오랜 시간 야생종을 선발하고 개량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짚었다.
실제로 오늘날 재배되는 주요 작물 상당수는 야생식물에서 기원했다. 배추와 브로콜리 등은 유채류와 같은 야생자원에서 비롯됐고, 키위 역시 야생 다래류에서 출발했다. 만약 현재의 작물이 병해충이나 기후변화에 취약해질 경우 이를 보완할 유전자는 다시 야생식물에서 찾아야 한다.
나 실장은 “이 때문에 야생식물 보전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현재 세대가 활용하는 자원이자 미래 세대가 다시 꺼내 써야 할 가능성의 저장고를 지키는 일”이라며 “기후위기와 재난으로 자생지가 사라질 수 있는 만큼 종자를 중복 보존하고 필요할 때 복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드볼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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